[오피니언]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 카페 벨에포크 [영화]

글 입력 2021.06.13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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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가장 서글프게 다가오는 감상 중 하나는 우리가 언젠간 인생의 벨에포크(=아름다운 시절)를 과거에서만 찾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예감이다.


이는 새것으로 태어나 하루하루 중고가 되어갈 수밖에 없는 모든 이들의 피할 길 없는 숙명 같은 것일 테다. 그래서 어느 유명인의 소위 ‘리즈’라 불리는 시절을 편집해서 올려놓은 영상에 환호하는 댓글들을 볼 때면 종종 씁쓸한 기분이 들곤 한다. 저토록 완벽에 가깝게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들조차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울 수는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나 같은 범인은 어떻겠나. 삶은 어쩌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지난 인생 속 가장 아름다웠던 자기 자신을 향한 그리움의 축적일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은 과거를 선택하고, 그때를 세트장에서 재현하여 역할놀이를 즐길 수 있는 시대. 연필과 물감, 책이나 신문 같은 것들이 하나, 둘 없어져 가는 시류에 떠밀려 은퇴한 아날로그식 만화가이자, 여전히 잘 나가는 심리학과 의사인 아내 마리안느(화니 아르당)에게 짐짝 취급을 당하는 뒷방 늙은이인 빅토르는 자신에게 돌아가고 싶은 시대가 언제냐고 묻는 역할놀이 회사 직원의 물음에 “1974년 5월 16일”이라 대답한다. 그 이유는 한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날 그 카페에서 만난 사람을 제가 아주 좋아했었죠.” 그러자 직원은 되묻는다. “그분은 어디 계신데요?” 빅토르는 대답한다. “죽었어요. 몇 년 전에.”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그 첫사랑은 사실 지금의 아내 마리안느다.


빅토르는 가장 열렬하게 사랑했고, 벅차게 사랑받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참으로 오랜만에 행복을 느낀다. 과거로부터 길어 올린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를 착실히 살아가야 하는 동력이 되어(역할놀이를 위해선 하룻밤에 1만유로라는 거금이 필요하기 때문에)그를 오랫동안 녹슬게 만든 무기력을 벗겨내기도 한다.

 

이미 지나가 버렸기에 결코 훼손될 수 없는 과거의 아름다움 속에서 그는 영원히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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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거는 돌아갈 수 없기에 과거인 것이고, 현재에 재현된 과거는 그럴싸한 가짜일 뿐이다.

 

빅토르는 애초에 알고 있었던 이 사실을 줄곧 외면하다가 일련의 계기를 통해 기어이 깨닫고 만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 1974년의 그 카페로 돌아가 아내와 마주 앉는다. 과거의 그녀를 흉내 내는 배우가 아닌, 그와 함께 수십 년의 시간을 함께 살아온 현재의 마리안느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그는 깨닫는다. 죽었던 건 과거의 마리안느만이 아닌, 자기 자신이기도 했다는 것을. 그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사실까지.


오랜만에 즐거웠던 대화를 마친 후, 마리안느는 1974년의 첫 만남에서 그랬듯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카페를 나선다. 1974년의 빅토르는 그 목도리를 주워들고 그녀에게 달려가 다음 데이트를 약속받았었다. 2020년의 빅토르도 그 목도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46년 전의 그 자리에는 빨간 목도리가 있었지만, 46년이 지난 지금은 갈색 목도리가 놓여있다. 빨간색의 정열은 과거의 것이고, 현실에 빛바랜 갈색은 현재의 것이다. 저 갈색의 목도리를 쥐고 카페를 나서는 순간, 그는 다시는 이 아름다웠던 과거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는 빅토르의 눈에 46년 전의 그녀가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눈 깜빡하는 순간 사라진다. 찰나의 미련 같은 환상. 빅토르는 그제야 결심이 선 듯 가볍게 웃는다. 애초에 그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한 과거는 이미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쌓인 그리움, 후회, 미련 그 모든 것에 대한 계산을 마치고 카페를 나서는 것뿐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으리라 믿으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시간 속에 또 있을지 모를 다음 벨에포크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임현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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