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슈트(Suit). 어쩌면 가장 자유로운. [패션]

글 입력 2021.06.11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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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를 입거나 입은 사람을 볼 때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실감한다.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모르게 번듯한 직장에서 굉장히 일을 잘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괜히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당찬 사람 같기도 하다.

 

세미 슈트나 조금 독특한 디자인의 슈트를 입은 사람을 볼 때는 옷을 참 잘 입는구나 싶다. 출근할 때 입는 슈트나 데이트할 때 입는 슈트나 다 같은 슈트인데도 매력이 너무나 다르다. 상황이나 종류에 따라 휙휙 변하는 게 슈트가 가진 매력이고 나는 그 매력에 빠져가는 중이다.

 

 

 

자유로워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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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Hunters Race on Unsplash

 

 

어렸을 때, 그러니까 21살이나 22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장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늦바람에 사춘기가 또 찾아온 건지 수트라는 게 마냥 격식을 따지고 틀에 박힌 옷으로 보였다. 멋있는 어른인 척하는 듯해 낯간지럽기도 했다. 부질없는 반항심과 나는 자유롭고 개성 있는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슈트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슈트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 후에는 그 시절의 내가 상당히 부끄러웠다. 이런 경험을 몇 번 더 겪고 나서야 제대로 알기 전에 섣부르게 판단하는 걸 지양하고 책이나 기사, 논문을 뒤적거려 어떤 스타일이나 옷에 관해 공부하게 됐다.


슈트가 격식을 따지는 옷이라는 건 사실이다. 귀족이나 상류층이 자신의 권력과 신분을 과시하고 재력을 뽐내기 위해서 만든 옷이 슈트니 틀린 말은 아니다.

 

주로 사교계 모임에서 슈트를 많이 입었기에 눈에 보이는 형식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무척이나 길게 내려오는 코트와 몸에 달라붙는 재킷, 거기에 조끼와 스타킹까지 신으니 불편하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거추장스러운 모습을 했던 이유가 그 과시욕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물자가 부족하고 삶이 궁핍해진 탓에 실용적인 걸 추구하게 되면서 거추장스러운 장식을 전부 덜어내면서, 슈트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변했다.


남성만 입을 수 있던 슈트를 지금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입는다. 치마를 같이 입기도 하고 남성의 신체에 맞춰 재단된 재킷을 여자가 입기도 하면서 다양하게 변하던 슈트는 이제 프린팅이 들어가기도 하고 해체주의와 만나 굉장히 전위적인 모습으로 사람들의 옷장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슈트는 이제 더는 격식을 차리기 위한 옷이 아니다. 격식도 차리면서 개성도 표현할 수 있는 옷이다. 파스타를 만들지 빵을 만들지 내 의지에 달린, 어느 쪽도 될 수 있는 하나의 반죽이다.

 

 

 

슈트; 격식 속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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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via Vogue

 

 

패션에서 사회적 차별이나 고정관념에 저항하는 아이템을 꼽자면 아마 대표적인 게 미니스커트 정도일 거다. 청바지나 비키니도 비슷한 맥락에서 훌륭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안타깝게도 미니스커트의 그림자에 가려져 큰 주목은 못 받았다. 미니스커트가 자유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변화가 그렇게 극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좀 더 넓은 범위를 포용하고 더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던 옷은 슈트다.


슈트는 귀족이나 상류층을 위한 옷이라 실용성보다는 눈에 보이는 화려함과 예절에 따라 이것저것 갖추다 보니 굉장히 거추장스러웠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운지 코트의 길이를 줄이고 재킷도 좀 더 펑퍼짐해지면서 실용적인 모습을 갖췄고, 귀족이건 상류층이건 중산층이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일상에서 흔히 입는 옷으로 여겨졌다.

 

1960년대에는 비틀즈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의 사랑과 함께 하나의 패션 트렌드가 됐다. 1980년대쯤에는 허리를 압박하던 조끼도 사라졌다. 지금에 와서는 공적인 자리를 제외하고는 구태여 모든 형식을 다 갖출 필요도 없고 자기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 원하는 대로 입을 수 있는 패션의 하나로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사교계 여성을 위한 옷이었던 스커트 슈트도 ‘파워 드레싱(Power Dressing)’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남성의 권위와 여성을 억압하던 사회에 맞춰 싸우기 위한 전투복이 됐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 회사에서 일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기에 직장에서 입던 정장을 여성이 입는다는 건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세계의 문을 깨부수고 여성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일이었다. 이브 생로랑이라는 천재의 탄생이 가져온 스모킹 슈트(Smoking Suit)는 슈트가 여성의 섹시함과 우아함을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증명하고 슈트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면서 이 변화를 더 몰아붙였다. 내 옷장에 걸려있는 다채로운 슈트는 그들의 유산이다.


현대인들은 슈트를 출근할 때나 격식을 갖춰야 하는 자리에서 여전히 슈트를 입지만 멋 좀 부리고 싶은 날에도 입는다. 셔츠 대신 티셔츠랑 입기도 하고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같이 신기도 한다. 그게 잘못됐다고 하거나 그렇게 입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말 했다가는 구닥다리 취급받는 시대다.

 

오히려 개성 있고 자유로운 모습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남자도 입고 여자도 입으며, 잘 사는 사람이건 못 사는 사람이건 관계없이 슈트를 입는다. 입고 싶은 사람의 취향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조금 딱딱해 보이는 모습이 그 자유로움과 대비를 이루면서 묘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누군가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싶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네 마음대로 해봐’라는 말과 함께 한 벌의 슈트를 건네고 싶다.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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