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글을 쓰기 싫은 이유

나는 글이다
글 입력 2021.06.1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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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펜을 잡을 수 있게 된 나이부터 나는 글쓰기를 강요받으며 자랐다.

 

환경 백일장, 나라사랑 글쓰기 대회, 양성평등 글짓기 대회, 봄맞이 문학 대전. 누군가의 자기소개서를 채워주는 이런 대회 참여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는 그 안에서 왜 글을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들러리 역할을 수행했다. 영광의 대상, 금상, 은상 그리고 동상. 이런 상들을 받은 경험이 없으니, 나는 제 역할 수행을 꽤, 잘했다고 볼 수 있다.

 

왜 쓰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영영 글쓰기를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다. 살아 보니 글쓰기가 필수라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대학에서는 레포트 과제로 최소 A4 2장, 최대 6장을 요구했고, 모든 활동에는 보고서, 기획서라는 것이 필요했다. 원하는 활동, 직무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가 필수였다.

 

나는 공허한 백지를 채우기 급급했다. 고민 없이, 진정성 없이 적고 또 적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글을 쓰기 싫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내밀한 감정을 기록하는 일기는 숙제로 검사 및 평가를 받아야 했고, 정답 혹은 올바른 답안이 있는 글쓰기를 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미국처럼 에세이를 쓰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면 글쓰기에 재미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재미도 모른 채 끄적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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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기치 않은 만남이었다. 정말 우연히 찾아온 기회로 글을 쓰며 새로운 나를 발견했다. 이소라의 노랫말처럼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나야 했다.

 

그만큼 혼란스럽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던, 믿어 왔던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별 고민 없이 휘갈겨 썼지만, 그 만남 이후부터는 그럴 수 없었다. 꽉 막힌 도로 위에 정체된 기분으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봐야만 했다. 문장을 적어 내릴 때마다, 단어의 공백마다, 글의 자간마다 걸려 넘어졌다.

 

타자 위에 손을 올릴 때면 ‘잘’ 쓰고 싶다는 욕구가 커진다. 그 욕구 혹은 욕심은 나를 짓누르고 글쓰기를 힘겹게 만들었다. 전에는 강요받아 쓰기 싫었던 글이 이제는 완벽히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쓰기 싫어졌다. 새로운 표현을 하고 싶고, 나만의 시각을 견지하고 싶다. 그렇다고 심히 과한 표현을 쓰거나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돌진하기는 싫다. 너무 쓰기 싫은데 너무 쓰고 싶다. 이쯤 되면 나는 글쓰기에 자격지심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은 곧 나다. 흐릿했던 순간은 글로 옮겨지며 명료해진다. 글은 내 감정을 정의해준다. “새파랗게 질린 성실함을 외면합니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썼다. 당시 나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침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건강한 생활을 하고 싶어도 몸이 뜻대로 되질 않았다.

 

쉽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딱 저 문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새파랗게 질린 성실함을 끝끝내 외면하는 기분이었다. 글은 이렇게 표현하기 어려운 나를 표현해줬다.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 되고자 한 것과 되지 못한 것에 사로잡혔다 그 사면체는 조금의 공간도 허용하지 않았다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듯 멈추지 않고 나를 짓눌렀다 보드라운 살이 차가운 금속성을 만나 부르르 떨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초록 칠판을 긁는 느낌으로 벽면을 마구 할퀴었다 고름이 흘러나왔다 막을 새도 없이 터져나왔다 게으르지 않게 끝까지 토해냈다.

 

 

어딘 가에 맺힌 응어리를 풀기 위해 위와 같은 글을 적기도 했다. 당시의 감정이 가물가물하지만어렴풋하게는 기억난다. 쓰는 것이 정말 좋으면서도 괴로웠던 것 같다. 메모장에 적어 놓지 않았다면 그 감정은 되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쯤 소환의 희망도 없이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보다는 글이고, 글은 곧 나다.

 

이 글은 사실, 쓰기 싫은 이유가 아니라 글을 쓰고 싶은, 써야만 하는 이유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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