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박한데 화려하게 부탁드려요 -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서울의 오르막길에 지쳤을 때, 서울 한복판의 평지에서 휴식을 찾다
글 입력 2021.06.0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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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답사로 궁궐 산책을 다녀왔다. 철저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던 나로서는 정말 오래간만의 외출이자 친구들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핸드폰을 울리는 초미세먼지 주의보에도 불구하고 조금 들떠 있었다.

 

무거운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종일 걸어 다니다 보니, 몸은 좀 (많이) 지쳤지만 2021년의 봄을 제대로 맞이한다는 설렘과, 인파가 몰린 곳에서 몇 발짝 물러나 고즈넉한 처마 아래 앉아 있을 때의 평안함이 참 아름다웠던 하루였다.

 

하루 동안 그렇게 여러 궁을 둘러본 건 처음이었다. 우리는 각 궁의 공간마다 다른 감성을 찬찬히 느껴보고, 시선을 살짝 돌리면 달라지는 배경을 충분히 눈에 담았다. 집에 돌아와 잔뜩 찍어온 사진들을 넘겨보며, 시간과 인파에 밀려 셔터만 몇 번 누르고 지나쳐야 했던 부분들을 세세히 살펴보았다.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현판들, 유려한 선을 따라 쭉 뻗어 봄날의 흰 구름을 걸고 있는 처마, 그 아래 가려져 고개를 치켜들고 보아야 하는 다채로운 문양들.

 

3개월이 지난 지금, 그 기억이 그리워질 때쯤 나는 김서울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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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는 공사 현장과 온갖 시위대를 지나

광화문을 통과하면 다른 차원의 세상이 펼쳐진다.

주변의 공기가 돌연 차분해지는 그 순간이 좋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p.5

 

 

내가 궁궐 산책을 다녀왔을 시기는 딱, 봄의 전령이 막 도착했을 때였다. 화려하고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을 찍기 제격이라고 이미 소문이 파다한 창덕궁의 홍매화를 보기 위한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내 주변에도 많은 지인이 봄을 맞아 꽃을 보러, 궁궐을 산책하러, 출사를 위해 많이들 궁을 찾았는데 며칠 뒤에 업로드되는 블로그 포스팅을 구경하는 게 내 소소한 취미였다. 넓디넓은 궁궐 안에서 너는 내가 못 본 어느 곳을 담아 왔는지, 혹시 같은 곳을 보았다면 너는 어떤 감상을 남겼는지. 여행기라면 여행기인 그 글들을 읽는 것이 제법 재미있었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은 딱 그런 느낌이다. 역사적 지식을 나열하며 나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이 책이 '에세이'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엉덩이가 데일 정도로,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불을 넣어 갈색으로 익기까지 한 바닥에

발효를 마친 빵 반죽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조선인들.

그게 심지어 구수한 들기름 냄새가 나는 방이었다니

그 귀여운 풍경을 상상하면

갓 구운 빵이나 갓 지은 쌀밥이 떠오르면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p.122-123

 

 

작가의 말을 듣다 보면 피식, 웃음이 나는 구간들이 있다. 물론 우리의 고궁들이 굉장한 가치를 가지고 있고 우리는 후손으로서 이에 존경을 표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이 책은 무조건적으로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궁을 걸으며, 직접 보고 직접 느낀 솔직한 생각의 흐름을 글로 풀어냈다.

 

 

뭐든 정석대로 하기를 좋아했던 세종 역시

누에치기를 적극 독려하며

왕비가 직접 비단 짜는 시범을 보이는 등의 행사를 열었다.

주말 출근과 등산에서 진정한 노동의 가치와 인간미를

찾을 수 있다던 과거의 상사들이 떠오르면서...

두 왕 모두 본인이 직접 누에를 치거나

비단을 짜지는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p. 133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연관 지어서까지, 다양한 시각에서 궁궐을 바라보다 보면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본문 중에 과거에는 이 궁궐에 수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궁궐을 속속들이 살펴보고, 친구에게 묻듯 조금 더 사적인, 조금 더 재미난 질문들을 떠올리다 보면 궁궐은 더이상 '텅 빈 공간', '역사 유적'으로만 보이지 않고, 공간에 녹아들어 있는 그 시절의 생활들이 엿보인다.

 

마지막 장, 4장에는 '궁궐의 물건'이 가득하다. 경복궁 안에는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박물관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독자들이 새로운 즐거움을 느낄 만한 물건들을 소개해 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왕세자입학도'였다. '왕세자입학도'는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 과정을 그린 그림인데, 격식을 차린 복잡하고 큰 행사였던 만큼 그림에도 왕세자가 궁궐 밖으로 나가는 모습부터, 입학 허가를 받고 궁궐로 다시 돌아오는 모습까지 담겨 있다.

 

큰 그림은 작은 부분으로 파고들수록 재미있는 법.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의 담 너머 대열이 살짝 흐트러진 모습, 행사에 늦었는지 뒤늦게 입장하는 모습, 복잡한 행사에 지친 듯한 표정까지 자세하고도 현실적인 묘사는 성대한 왕실 행사에도 조금이나마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

 

*

 

궁궐 산책에 대한 갈증에 집어 든 책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그 갈증을 조금 충족시켜줬으나 어떤 면에서는 갈증을 더 강하게 자극했다. 내가 보지 못한 곳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특히 창경궁 옥천교 아래 흐르는 조용한 물소리를 듣고 싶었고, 나무 그늘 사이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색깔이 보고 싶었다.

 

늘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애써야 하고, 고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고, 그러면서도 가장 높은 곳인 하늘을 올려다 볼 여유도 없는 서울에서 지치고 힘들 때, 모순적이게도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낮은 평지에서, 그리고 과거에는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살았던 곳에서 우리는 휴식을 찾을 수 있다.

 

'산뜻한 시선과 상상을 따라 즐기는 작가만의 고궁 언박싱',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함께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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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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