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깊은 사랑에 빠지는 건, 깊은 불행에 빠지는 것. 오페라 '토스카'

글 입력 2021.05.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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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국으로 공연장에 드나드는 일이 거의 없다시피 한 요즘. 운 좋게 예술의전당에 갈 기회를 얻었다. 제 12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참가작 중 하나인 <토스카>가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됐다. 오페라를 보러 간 건 처음인데, 간신히 시간 맞춰 가니 매표소가 사람들로 가득 차 웅성웅성했다. 중장년층이 대다수였고 그 많은 사람들이 어쩐지 다들 서로를 알아보며 반가워했다. 멋들어진 스카프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악수하며 사교적인 인사를 주고받는 공연장 앞. 혼자 꼬깃한 남방을 걸치고 앉은 내 기분도 조금씩 들뜨기 시작했다.

 

무대 정면 위에는 커다란 전광판이 있다. 나는 한국의 오페라니 당연히 한국말로 노래할 줄 알고(뮤지컬처럼!) 전광판의 용도를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전광판은 대사 자막을 띄워주는 용도로 쓰였다. 공연은 전부 이탈리아 원어로 진행한다. 전광판에 첫 대사 ("아! 이젠 됐네")가 나타나던 순간 마음과는 달리 내가 얼마나 클래식 예술에 문외한인지 또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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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이후 로마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정치범 '안젤로티'의 도주에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인 화가 '카바라도시'는 탈옥해 성당으로 온 안젤로티를 발견하고 그를 숨겨준다. 카바라도시 역시 로마의 정치범 탄압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긴장되는 상황에서 오페라의 제목과도 같은 여인, 플로리아 토스카가 등장한다. 카바라도시의 연인이자 도시가 알아주는 가수이다. 그녀는 카바라도시 그림 속에서 마리아라는 다른 여인의 모습을 보고 질투심에 불탄다.

 

1막의 주제는 사랑과 질투라 할 수 있다. 토스카는 안젤로티로 인해 초조해하는 카바라도시가 바람을 핀다고 의심하고, 뭔가 숨기고 있는 걸 알아내려는 듯 움직인다. 안젤로티를 피신시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아는 관객의 입장에선 어떤 오해와 배신이 일어날 듯 긴장된다.

 

하지만 질투는 불타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 토스카. 나는 오직 당신의 두 눈 속에만 빠져 있소." 카바라도시는 자신의 사랑을 한치의 의심없이 노래하며 토스카를 설득한다. 두 사람은 화해하고 저녁에 만날 약속을 하며 토스카가 떠난다. 1막은 마지막까지 이어질 토스카의 특징을 드러낸다. 관객은 그녀가 질투심과 분노에 쉽게 사로잡히지만, 그만큼 사랑도 많은 당찬 여인이라는 걸 알게 된다. 교활함을 숨기지 않는 경시총감 스카르피아 앞에서 토스카의 맹목적인 사랑은 위험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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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는 인물의 삼각 구도가 잘 드러난다. 인물들도 전형적이진 않지만, 성격이 매우 뚜렷해 각자 자신이 가진 성격이 만들어내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연극이나 문학 작품에서 세세한 디테일로 인물에게 양면성(입체성)을 부과하는 기술에 익숙한 나는 <토스카> 속 인물들의 확고한 개성이 매우 신선했다. 스카르피아의 비열함, 토스카의 사랑, 카바라도시의 충직함은 각자가 단 하룻밤 사이 죽음을 맞는 원인이 된다.

 

사실 이 인물에게 다른 면이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스카르피아의 내면에는 일종의 고뇌가 있지 않을까?(나는 선역, 악역을 가리지 않고 이런 서사를 은근히 기대하는 몹쓸 버릇이 있다) 없다. 스카르피아는 전혀 거리낌없이 잔인하고 비열하다. 일말의 고뇌 없이, 웅장한 목소리로, 목표를 향해 사악하게 질주하는 인물을 보는 건 요즘에 보기 드문 강렬한 경험이다.

 

인터미션 45분을 제하면 95분이라는 짧은 극에서 날 가장 사로잡았던 건 바로 이 인물들의 단순함이다. 이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자기 입장을 정했으면 그대로 밀고 나간다. 스카르피아는 악을 카바라도시는 선을 상징한다. 카바라도시가 안젤로티에 대한 굳건한 대의감은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바뀌지 않는다. (스카르피아의 잔인함도 토스카의 구슬픈 눈물에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눈물은 날 더 달아오르게 하는구나" 파다) 그 가운데 있는 토스카는 그마다 고뇌하는 주인공이다. 카바라도시를 살리기 위해 스카르피아에게 몸을 내줄 것인가,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것인가. 스카르피아는 킬킬대고 뒤에선 고문 당하는 카바라도시의 고통스런 신음 소리가 울린다. (으아아, 토스카! 절대 안젤로티에 대해 털어놓으면 안돼! 토스카! 토스카!)

 

양 쪽에서 자기 이름을 웅장하게 불러대니, 토스카는 흐느끼며 주저 앉는다. 저런, 토스카!(성격 급한 스카르피아는 벌써 바지 벨트를 풀렀다)

 

나는 토스카가 스카르피아에게 굴복할 줄 알았다. 스카르피아는 꽤나 감미롭고, 충직하고 무력한 카라바도시가 고통에 차 토스카를 부르짖는다. 선정적인 2막의 장면. 아름답고 충직한 여인이 결국 파멸에 이를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건 고전 작품이니까. 주인공 토스카에게 더 나은 선택지란 없다. 그녀는 스카르피아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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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토스카에게는 외부 상황에 굴하지 않는 불 같은 성격이 있다. 그 성격이 비극을 만들어내지만, 잊지 못할 개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토스카는 탁자 위의 칼을 집어 스카르피아를 찌른다. 여러 번. 악에 순순히 자신을 내어줄 수도, 사랑을 포기할 수도 없는 토스카의 비극이다.

 

사랑과 계략과 살인이 얽힌 이 극은 결국 모두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토스카는 스카르피아가 카바라도시를 공포탄으로 사형하는 척만 해주고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었다. 결국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를 죽이고, 토스카는 스카르피아를 죽이고, 사랑을 잃고 벗어날 곳 없는 토스카는 자살하고.

 

극 속 최고 반전은 카바라도시의 죽음이다. 시놉시스를 전혀 알고 가지 못한 관객이라면 더없이 놀라겠지만, 사실 이 반전은 시놉시스 안에 그대로 들어 있다. <토스카> 시놉시스의 신기한 점이다. 연극이나 문학이라면 긴장을 위해 숨겨놓을 줄거리를 이미 팜플렛에 다 드러낸다. 이 오페라에는 망설임이 없다. 시놉시스를 본 관객은 카바라도시가 죽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 과정이 어떻게 될 것인지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모든 정보를 이미 준다해서 비극의 강렬함이 덜해지진 않는다. 극이 이미 인물의 삼각 구도, 선, 악, 주인공의 고뇌와 선택 등 탄탄한 구성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단 하룻밤 사이에 이뤄진다. 사랑과 질투, 정치, 배신, 고문, 살인까지 피처럼 붉은 이야기다.

 

일찍 죽지만, 마지막까지 모두를 파멸로 이끈 스카르피아의 대사가 이 극을 관통하는 게 아닌가 싶다. "깊은 사랑에 빠지는 건, 깊은 불행에 빠지는 것." 토스카는 당찬 여인으로 마지막까지 주도권을 지켰지만, 그녀도 인간사의 격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새처럼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토스카를 보며 나는 세상의 잔인한 무상함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도 카바라도시와 껴안고 사랑을 노래했던 여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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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가 스카르피아를 칼로 찌른 3막의 인터미션. 내 옆의 두 관객은 서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은발이 매력적이었고 공연 내내 가래 끓는 소리를 우렁차게 낸 사람들이다.

 

"이 여자, 토스카인가? 참 안됐어. 질투심은 있어도 신앙심은 깊은데, 사람 괜찮은데 말이야."

"맞아. 정치범이란. 후, 우리 때에도 정치범이니 하면서...많이 그랬지."

"참 괜찮은 사람들인데 말이지."

"쟤, 쟤만 빼고 말야. 누구지, 스크피아?"

"스키피아? 아, 스카르피아"

"참 안된 이야기야."

 

이 담소에서 감상의 모범을 느낄 수 있다. 공감하기, 내 경험에 비추어 보기, 이해하기...괜찮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비극의 수렁에 뛰어들 때 느끼는 연민. 오페라는 매력적인 장르다. 오페라는 비극/희극을 극적인 소재를 이용해 확실하게 보여준다. 인간적인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새처럼 아름답다. 인간의 목소리로 하는 클래식 음악의 진수같다. 거기에 연극이라는 극적 서사가 더해진. 눈으로는 대사를 보고 귀로는 음악을 듣는다. 토스카도 카바라도시도 스카르피아도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인물로 형상화되고, 그 인물은 다시 하나의 선율로서 예술의 세계에 흡수되는 느낌이다.

 

연극이나 소설에서 인물은 우리의 삶과 너무 가까워, 공감하기 위해 양면성과 비밀을 필요로 한다. 오페라 예술 속 인물들은 양면성에 흔들릴만큼 유약하지 않다. 모두가 각자의 전차에 타고 있는 것처럼 굳건하게 주어진 길을 따라 달린다. 이들의 목소리가 내는 선율은 가녀리고, 우아하고, 웅장하게 울리며, 우리 가슴 속에 그대로 날아와 박힌다. 정적이 내려앉는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그 선율에 온 힘으로, 열정적으로 박수를 친다. 사랑과 죽음, 배신과 정치라는 인간사가 그 속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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