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기록되지 않은 목소리를 듣다 - 여성, 귀신이 되다

글 입력 2021.05.27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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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새로운 공포영화가 만들어지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괴담은 여기저기로 퍼진다. 나 역시 괴담을 좋아해서 종종 일부러 찾아보곤 한다. 괴담의 매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해 오직 사람들에 반응에 의해 생명력을 이어간다는 데 있다. 그래서 한 사회에서 유행하는 괴담에는 늘 그 사회의 단면이 담겨 있고,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리가 녹아 있다. 과거에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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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귀신이 되다》는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괴이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여성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 78편을 소개한다.

 

주로 조선시대가 배경으로, 저자는 필기·야담집, 고소설 등 다양한 자료에서 이야기들을 모았다.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국어 교과서에서 본 기억도 날 만큼 익숙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는 거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데다가 역사적으로도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도입부만 들어도 전개, 절정, 결말까지 예상이 되는 '다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저자는 비슷비슷해 보이는 여성 귀신 이야기들을 유형별로 나누고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더불어 이야기 안쪽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둘러싼 틀, 이야기의 바깥까지 섬세하게 살핀다. 객관적인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야기는 향유자들의 편의에 따라 각색되기 때문이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 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45쪽
 


예를 들어 ‘아랑 설화’로 대표되는, 억울하게 죽은 여성 귀신이 새로 부임한 원님을 찾아오는 이야기 유형에서 범죄 가해자는 사대부 남성보다 신분이 낮은 경우가 많다. 이 귀신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은 대부분 사대부 남성이다. 이때 귀신은 사대부 남성의 정의롭고 용감한 면모를 돋보이게 만드는 도구에 가깝다. 이 이야기는 결국 사대부 남성을 위한 이야기인 셈이다.


괴담의 묘미는 읽는 사람이 공포를 체험하면서도 실제로 위험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그 선을 넘는다면 괴담은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불쾌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옛 괴담들 역시 이 공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계모의 모함을 받아 귀신이 된 이야기, 사랑에 배신당해 귀신이 된 이야기 등 다른 유형에서도 마찬가지다. 왜 계모와 딸들의 이야기에서 아버지의 비중은 거의 없으며, 남편의 오해를 받은 아내는 그저 그 자리에서 오해가 풀리기를 기다리기만 할까.


이야기의 안팎을 두루 살피면 유교질서를 벗어난 여성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했던 당대 기득권층의 모습과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았을 실제 여성들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이 시대의 여성은 귀신이 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쉬웠고, 귀신이 되어서야 마음 속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조선시대 사대부 남성의 관점에서 단편적으로 읽어왔음을 깨닫는다.

 

그저 옛이야기로 치부하기에 이 이야기들에 나온 여성들의 처지가 전혀 터무니없지만은 않고 그 속에서 오늘날 여성의 삶 또한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무서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귀신이 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들은 계모와 전처의 딸, 첩과 정실부인 등의 관계로 등장해 한 쪽이 다른 쪽을 모함해 죽음에 이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누명을 벗기고 질서를 바로잡는 건 대부분 사회의 기득권인 ‘정의로운’ 사대부 남성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들을 위로한 것은 성리학 질서 바깥에 있는 또 다른 여성, 무당이었다. 제사를 주관한 것은 사대부 남성이었지만 무속신앙은 그 시절부터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여성의 영역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더 나아가 저자는 남성이 주인공인 여러 신화에 밀려 퇴색하고 축소된 여성 신화도 소개한다. 설문대할망, 마고할미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성, 귀신이 되다》의 표지에는 각도에 따라 ‘귀신’에서 '신'이 강조되어 보인다. 신(神)과 귀신(鬼神)의 ‘신’은 한자가 같다. 신과 귀신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둘 다 기존 질서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질서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기도 한다.

 

귀신에서 무당, 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읽다 보면 어떤 생명력이 느껴진다. 동시에, 지금까지 다 안다고 믿어왔던 이야기들을 사실은 몰랐다는 것도 알게 된다. 평소 괴담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 옛이야기를 이 책으로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여성, 귀신이 되다


지은이

전혜진


출판사

현암사


발행일

2021년 5월 10일


쪽수

344쪽


분야

인문>한국신화 / 인문>교양인문


16,500원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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