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행가 K를 따라,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 2 [음악]

사유 여행가 K의 단상
글 입력 2021.05.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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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과 이어짐)

 

 

 

7. 국경을 넘는 기차


 


 

 

어딘가로 출발하는 사람들, 이제 막 도착하는 사람들.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짓는 아이들과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 짓는 어른들.

 

넓은 역 안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상점들과 가게.

 

이제 막 나온 근사한 점심 식사를 먹는 사람과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굳은 자세로 조용히 책을 보는 사람과 상기된 얼굴로 통화를 하는 사람.

 

터질 정도로 부푼 쇼팽백을 들고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을 꼭 껴안아주는 또 다른 사람.

 

천천히 역 안의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출발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오래 머물던 것은 아니지만, 정이 들었던 이 곳의 풍경과 분위기를 뒤로 한 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하다. 방금 먹었던 레토르트 파스타의 맛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살짝 느끼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맛있었다.

 

적적한 마음에 중앙역 서점에서 동화책 한 권을 샀다. 귀여운 표지가 인상적인 동화책. 물론 제목이 뭔지는 모른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어. 사고 나서 책을 살짝 들춰봤는데 하늘의 별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는걸로 봐서는 꿈과 관련된 책일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어린 왕자와 비슷한 이야기일까? 그러보니 어린 왕자는 읽는 시기에 따라 다가오는 느낌이 전혀 다른 동화라고 하던데, 어린 아이 때 읽은 느낌과 어른이 되어 읽는 느낌이 다르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생각난 김에 한국에 돌아가면 한번 읽어봐야겠어.

 

이제 출발 시간까지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조금 뛰어야 할 것 같다.

 

아슬아슬하게 기차에 탄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내 자리는... 다행히 창가자리다. 창 밖을 바라보며 여행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창과 붙어있는 좌석이 너무 좋다. 이제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려 한다.

 

 

 

8. 떠나자


 

 

 

이 시간이 마지막일 이 도시.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들고야 만다.

 

꿈만 같던 이 곳을 다시 올 수 있을까? 그런 때가 올까?

 

왜 항상 떠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이 드는건지.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다녔어야 했는데, 더 많은 것을 경험해봤어야 했는데, 지금 이 순간은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이라는 걸 조금 더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더 많이 사랑해줄 걸. 더 아껴주고 더 안아줄 걸. 더 자주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더 많은 얘기들을 나눌 걸. 왜 항상 지나고 나서야.

 

추억 속에만 머물게 된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런 때가 올까?

 

더이상 그런 추억에 머물면 안된다고 머리는 얘기하지만 아직 내 마음이 그 순간을 보내지 못해 미련이 남고 후회가 남는다. 다시 한번 기회가 올까? 언젠가 때가 온다면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 함께했던, 우리 사랑했던 수많은 날로 다시 걸어가자

 

 

 

9. 우리의 음악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그때를 기억해.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며 그 노래를 들려줄 때, 좋아하는 계절과 좋아하는 날씨를 설명하며 환한 웃음을 내게 보여주던 그때를 기억해.

 

그 순간이 얼마나 나에게 아름다웠는지, 그대는 알까.

 

우리 함께 했던 계절이 지나가고 우리가 함께 다녔던 골목이 변해가고 우리가 함께 찍었던 사진이 빛을 바래도, 우리가 함께 들었던 노래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아직까지도 그 노래를 들으며 그때 그 순간을 떠올리곤 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그런 순간을 그리며 오늘도 이 노래를 꺼내들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대가 듣던 음악을 다시 또 듣고 있겠지, 오늘처럼

 

 

 

10. 믿을게


 

 

 

하루가 지고 있다. 이때가 되면 생각이 제일 많아진다. 남들은 새벽이 되면 감성이 차오르고 예민해진다고 하지만, 나는 초저녁, 이때쯤 제일 감수성이 풍부해진다. 그리고 이때가 되면 나는 오늘 하루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풍경을 마주하고 어떤 새로운 것을 경험했으며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꼈는지, 오늘의 내 기분은 어땠는지를 생각하며 오늘 하루를 복기한다.

 

그날 이후 새롭게 만든 나의 습관이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나는, 여유가 생기면 그 기억 때문에 항상 쉽게 우울해지곤 했다. 당시에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했는데, 오늘을 충실히 살자는 다짐으로 하루가 끝나갈 즈음,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를 떠올리며 '난 오늘 잘 살았나?'를 떠올리면 그나마 그러한 고통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이 시간이 오히려 더 편하다. 사람이 쉽게 바뀐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노력하면 그런대로 바뀌긴 하는걸로 보아, 역시 하기 나름인 것 같다. 이제 이 시간만큼은 더이상 그런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여행을 오니까 더 좋아진 것 같다. 얼굴에 생기도 돌고 어깨가 처지지도 않으며 걸음걸이도 무척 가볍다. 사람들이 걱정을 정말 많이 했는데, 지금의 나를 보면 안심하려나? 저기 저 노을이 내게 작별 인사를 한다. 내일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면서. 오늘도 괜찮았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이 가장 괜찮았다. 점점 더 괜찮아지는 것 같다.

 

그때도 지금같은 저녁 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다울 때 였지.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 찬연한 빛을 뽐내고 있을 적, 우리는 긴 소설의 마침표를 찍었다. 결말은 내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새드엔딩. 한번 찍어버린 점은 결코 그 모양을 바꾸지 않았고, 쉬어가길 바라는 나의 마음을 기어코 외면해버렸다. 그런 와중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결정이 잘했다고 믿는 것이었다. 그게 가장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것,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게 가장 덜 아픈 선택이었다는 것.

 

그래, 괜찮을 거야, 다 괜찮을 거야. 우리가 내린 그 결정은 잘했던거야. 그러니 더이상 서로 미안해 하지 말자.

 

마음속 남은 것들은 털어내고, 괜찮아 다 괜찮아 지난일이야. 슬퍼했던 마음은 이제는 모두 벗어내고

 

 

 

11. 터미널


 

 

 

알지 못했다.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 오게 될 것이란 걸.

 

또한 모르고 있었다. 네가 아파하고 있었다는 걸.

 

많이 표현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에 서투른 나여서, 아직은 미숙한 나였기에 네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짐작하지 못했어.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널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을텐데.

 

함부로 말해서 미안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고 말을 할 걸. 이 말이 너에게 어떻게 들릴지 조금 더 고민하고 얘기할 걸.

 

네 마음을 일찍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네가 다가온 만큼 나도 다가갔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알았지만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뿐이야.

 

고마웠던 시간도, 서운했을 말들도 모두 한 때에 머물러 있길. 그 기억들이 다시금 떠올라 지금의 우리를 괴롭히지 않기를. 이제는 우리가 서로의 기억 때문에 아파하지 않기를.

 

그대여 나는 기억해 아직은 우리 여기에

 

 

 

12. 미뉴에트


 

 

 

집으로 돌아가는 날. 이곳을 떠난다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여기, 낯선 도시에서의 일들은 모두 잊지 못 할 것이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 내 깊은 생각의 단편들이 놓여진 곳인데. 떠나기 정말 싫지만, 여기 더 머물렀다간 한국에서의 내 자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런 무섭고 참담한 일은 당하기 싫으니 서둘러 준비해야지.

 

떠나왔으니, 이제는 돌아갈 차례.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할 테다. 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발생해도, 언젠가는 그 고통이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을 가진 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고통이 있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런건 너무 무섭잖아. 억겁의 고통이라니.

 

어쩌면 만남과 이별 또한 그런 것일까?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일지도. 지금은 힘들지만, 또 다른 사랑이 언젠가 내게 다가옴을 알기에 지금을 살아갈 수 있을 테지.

 

자자, 이상한 생각은 그만두고, 잊은 건 없나 확인해보자.

 

핸드폰 챙겼나? 아 오케이, 지금 들고 있고.

 

지갑? 뒷 주머니에 넣어뒀고.

 

여권? 아, 이것도 손에 들고 있군.

 

충전기랑 선글라스? 휴, 다행이다. 꽂아두고는 그냥 나와버렸네. 역시 나오기 전에 확인을 꼭 해야 한다니까. 선글라스는... 어딨지? 분명 아까 전에 내 손에 있었는데. 꼭 찾으려고 하면 안 보여요.

 

아, 어쩐지 방 안이 너무 어둡더라니.

 

세면도구랑 옷가지들? 어제 밤에 자기 전 두번이고 세번이고 확인했던 것들이니 안심해도 좋다. 이게 양이 제일 많거든.

 

여행지에서 산 기념품이나 주위 사람들에게 줄 선물? 저기 문 앞에 모셔놨다. 들고 가는 게 걱정이긴 하지만.

 

보이는 건 다 챙겼고, 그럼 다음 질문.


여행의 목적은 달성했나? 어느 정도는.

 

마음은 정리되었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는.

 

불안함은 많이 완화되었는가? 많이 나아졌어.

 

돌아가서 일은 잘 할 수 있겠지? '잘'은 장담 못해도, 욕 안 먹을 정도는 할 수 있을거야.

 

힘들어하지 않을 자신은? ... 노력해볼게.

 

돌아가서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잘 살 자신은 없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여행을 왔기 때문에, 몸을 움직이고 있기에 적당히 괜찮아 진 것일 뿐, 돌아가면 다시 그 기억 때문에 힘들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에게 새로운 인연이 다가올 것이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그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안돼, 우리의 이별이 없었던 일이길, 제발 꿈이길, 꼭 다시 볼 수 있기를, 이런 마음이었다면 지금은 나에게 한껏 너그러워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의 탓도 아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고 그렇기에 마음 아파할 필요가 없다. 응답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말고 그 일로 저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나를 구원해주자. 그리고 다음 사랑은 지금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자.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은, 그런 내 마음의 변화가 아닐까.

 

그러니 어서 출발하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다가올 사랑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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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 K의 긴 여행을 함께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인 '낯선도시에서의 하루'는 앨범 속 모든 노래에 에피톤의 감성이 녹아있고 그에 따라 듣는 이에게도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준다. 이 기회를 빌어 이런 좋은 노래들을 만들어 준 에피톤 프로젝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여러분이 이 앨범에 담긴 노래들을 들으며 어떤 기억을 떠올렸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떤 마음을 담아냈을지도 궁금하다. 여행가 K는 나의 해석에 따라 여행을 한 것이지만, 여러분이 어떤 여행가를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의 여행지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것이고 그 사람의 시각도 많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만들어내는 여행가 X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까?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 무슨 경험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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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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