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독특한 상상력과 담담한 문체로 건네는 위로
글 입력 2021.05.23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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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고


 

최근에 에세이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에세이란 누구나 금세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막상 써보니 그렇지가 않았다. 에세이는 어려운 글이었다. 나에게는 너무 익숙한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내는 것,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겹치지 않는 이야기를 선보이는 것, 평범한 소재를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것까지도. 남다른 시각으로 일상을 옮겨 낼 능력이 없다면, 일기장 바깥으론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쓴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특히, 작가들이 써낸 잘 정돈된 글에 관심이 갔다. 그들은 분명히 좋은 글을 써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글은 나의 일기와 그들의 에세이가 어떻게 다른지 별다른 설명 없이도 증명해주었다.

 

에세이만큼 글을 쓰는 사람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글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소설가가 쓴 이 에세이는 상당히 소설가답게 쓰였다. 저자인 오가와 요코가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남다르다. 상상력이 가득하고 감정이 풍부하다. 마치 커다란 확대경으로 삶을 바라보는 것 같다. 이 도구는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사이에서 웃음 짓게 하는 것들을 찾아낸다.

 

이 책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잘 알려진 작가 오가와 요코가 <마이니치신문>에 4년간 연재한 글을 엮은 것이다. 글이 신문에 연재되던 당시, 코너의 제목이 <낙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고> 였다고 한다. 듣는 순간 웃음을 자아내는 제목이었다. 마치 할머님들이 흥얼거리시고는 하는 노래 가사 같았다. 문장의 절반에 괴로움이 들어 앉았는데도, 듣는 이에게는 무거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복잡한 일상의 높낮이는 간결하게 요약되어 버렸다.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거지 하는, 흐르는 물과 같은 편안함이 문장 전체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이 제목은 정말로 작가의 글과 닮아 있었다. 소설가의 삶은 마냥 낭만적일 것 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그런 오르내림의 순간들에 대해 다뤘다. 그런데도 글에서는 시종일관 편안함이 느껴진다. 내가 매일 느끼는 고민을 이 작가처럼 다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삶은 일정한 궤적 안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통찰이 느껴졌다.

 

마치 산책을 하는 느낌이었다. 책상 앞,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할 때는 너무나도 버겁고 대단하게 느껴지던 것들도, 산책하며 떠올려보면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처럼. 소설가의 일을 다룬 이 책이 산책을 닮았다는 건 아마 그래서 나온 얘기였던 것 같다.

 

 

 

소설가의 쓰는 일


  

소설을 구상하고 써내러 가는 순간에 대해 내 멋대로 상상해본 적이 있다. 어쩐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몇 날 며칠이고 글을 쓰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러나 사실은 소설가가 발이 바쁜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 한 편을 위해 필요한 지식이 얼마나 방대한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긴밀히 협업해야 하는지를 잊고 있었던 탓이다. 이 책의 많은 글은 이런 소설을 위한 순간들에 관해 다루고 있다.

 

특히 그녀는 작가로서 느끼는 고민에 대해서 솔직하게 터놓았다. 소설가의 역할과 작품들에 대해서,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순간에 대해서 하는 고민. 소설가의 표현력이 뛰어나서 그런지 고민은 마치 내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중에서도 작가로서 마감에 대한 두려움을 전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원래 내 글로 메워져야 하는 페이지가 새하얀 채 인쇄기에서 철컥철컥 밀려 나와 제본된다. 책이나 잡지를 펼쳐 든 독자는 불쑥 나타난 하얀 페이지에 놀라서 눈을 깜박거리다 거기에 활자가 전혀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는 경멸하듯이 흥, 코웃음을 친다. 하얀 페이지 한 장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쌓인 인쇄물의 역사에 지우기 어려운 오점으로 남는다.

 

<이요르의 항아리 속> 중에서

 


우리는 서로의 고민과 괴로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많은 부분 감정적인 공유를 이룰 수 있다. 특히 좋은 표현들과 함께할 때 그렇다. 우리는 각자의 무거움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에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빈 페이지를 걱정해야 하는 작가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매번 스케줄러를 빽빽하게 채우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감의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그렇게 경험해봤거나, 혹은 경험해본 적 없는 표현에 대한 감탄과 공감의 반복이었다.

 

 

 

소설가의 사랑하는 일


 

소설가는 반드시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어야 함을 알았다. 쓰기 위해선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기 위해서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작은 것이라도 눈여겨보고, 그로부터 감동할 수 있다. 그렇게 감동하고 관찰하며 남은 풍경 사이에서 소설은 시작될 것이다. 오가와 요코는 자신이 일상에서 느꼈던 이러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전달한다.

 

그녀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묘사한 대상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엄마와 아빠, 반려견 러브에 대한 묘사에는 마음 저릿한 공감을 느끼게 된다. 특히 노견인 러브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때때로 흘러넘쳐 작가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런 감정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작가의 관심 대상은 때론 생각지도 못하게 상추 속 애벌레나 벌거숭이뻐드렁니쥐가 되기도 한다.


 

내 손으로 채소를 키우면서 구제해야 할 벌레들이 그렇게 밉지는 않아, 놀랍다. 예전에는 슈퍼마켓에서 사 온 채소에 민달팽이 한 마리만 있어도 소스라쳤는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꽁꽁 숨어서 잘도 여기까지 왔네' 하고 말까지 걸고 싶을 정도다. 채소가 주는 축복을 공유하는 동지애마저 느낀다.

 

<구멍 뚫린 양배추> 중에서

 


열심히 기른 상추를 다 파먹은 애벌레에게도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이 구절을 보면, 작가가 주변의 사물들에 얼마나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애정과 배움의 대상을 찾는다. 특이한 모양의 집을 짓는 육각 아메바에게서 창작의 본질을 배우고, 벌거숭이뻐드렁니쥐, 이 이름도 생김새도 기묘한 동물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낸다.

 

작가는 이렇게 익숙하거나 새로운 대상에게 애정을 쏟는 방식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런 관점에서 그녀가 보여준 여러 편의 ‚사랑하는 일 ‘에 대한 글은 다정한 온기와 더불어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가의 걷는 일


 

이 책의 제목이 왜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절대적인 비중만을 놓고 본다면, 이 책은 산책이 결정적인 소재는 아니다. 나름대로 결론은 이렇다.

 

 

일하는 곳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다.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 싶어 호텔 앞 공원을 빙빙 돌았다… 어느 틈엔가 '언짢음'은 조그만 자갈돌만 하게 뭉쳐졌다. 두서없었던 것이 손바닥에 쥐어질 만큼 조그맣게 응축된 것이다. 걷는 리듬에 맞춰 데굴, 데굴, 가슴뼈 사이에 굴러다닌다.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중에서

 

 

오가와 요코에게 산책은 상당히 중요한 존재였던 것 같다. 산책은 소설을 쓰다가 더는 펜이 나아가지 않을 때 의지할 만한 것이었다. 그녀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반려견 러브와 함께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십 년 넘게 그녀의 삶에 자리를 차지해 오던 것이었다. 산책 안에는 그녀의 쓰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함께 담겨있다.

 

이 책은 소설가로서 삶의 낙과 괴로움에 대해 쓴 글을 모은 것이었다. 제목은 과거를 돌아보며 작가가 던지고 싶은 메시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삶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가진 작가의 통찰이자 변하지 않는 삶의 궤적에 대한 확신이 담겨있다. 모든 상승과 하강은 결국 괜찮아지곤 했다는. 산책과도 같은 글이 모두에게 평온함을 선물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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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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