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보건교사 안은영'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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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홍당무> <보건교사 안은영>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나는 에세이를 좋아한다. 소설은 호흡이 길고 감정 소모가 커서 잠들기 전에 읽기 힘들지만, 에세이는 한 꼭지씩 읽고 덮기에 딱 좋다.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에세이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 이런저런 생각들에 머릿속이 시끄럽다가도, 한 사람의 말투가 듬뿍 묻은 정제된 글을 읽다 보면 나도 내 말투로 글을 쓸 마음 상태가 되곤 한다. 유난히 우울한 날에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살고 있나 싶어서 손이 가고, 집중이 안 될 때는 큰 집중력 없이도 술술 읽혀서 손이 간다.
이렇게 에세이를 좋아하지만, “나는 사실 이렇게 잘났다-“라며, “그니까 너도 이렇게 살아봐”라고 말하는 글들은 내게 매력이 없다. 어딘가 꼬인 건지, 내가 좋아하는 에세이들은 그 반대일 때가 많다. “제가 잘났는지는 딱히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조금은 망한 것 같기도 해요."라고 말하는 에세이.
오늘은 그런 에세이를 하나 소개해보려 한다. <미쓰 홍당무>,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경미 감독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이다.
망한 이야기를 농담처럼 들려주는 사람
인생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농담으로 넘기지 못하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서 혼자 끼적였던 지난 15년의 부끄러운 기록들을 모았다. 이제 나의 철없고 부실한 농담들이 계획대로 가지지 않는 삶에 지진 누군가에게 작은 웃음이 되면 참 좋겠다.그럼, 덕분에 나도 정성 들여 크게 웃고 다음 인생으로 넘어가보겠다.- <잘돼가? 무엇이든> 프롤로그 중에서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온갖 ‘망한 이야기’의 총체다.
연애가 망한 이야기, 영화가 망한 이야기, 머리 스타일이 망한 이야기, 세상이 망한 이야기 등등. 아주 다채롭게 망한다. 현실에서도 망하고 꿈속에서도 망하고 상상 속에서도 망한다.중요한 건 망했는데 안 망한 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차게 망한 이야기를 가리거나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들려준다. 그래서인지 나도 뭔가 망한 것만 같을 때마다 이 책을 찾게 된다. 돌아보면 별거 아닐지 몰라도 그때만큼은 정말이지 다 망한 것 같을 때가 다들 있지 않나.이 책은 그럴 때 어떻게 헤쳐나가면 되는지 극복비결을 알려준다거나, 다 잘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복하려다 또 망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이런 이야기를 힘들 때 뭐하러 읽나 싶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와 비슷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그 마음 상태를 솔직하게 적어둔 걸 읽고 있자면 꽤 위로가 된다.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는 것과 비슷하다. 멋있고 행복하기만 한 삶이 아니더라도, 이 사람 살아가는 걸 보면서 나도 같이 좀 살아볼 마음이 든다.그리고 솔직한 만큼 중요한 건, 그 와중에 웃긴다는 것이다. 웃지 못할 정도로 망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농담을 한다. 그럼 나는 그의 농담에, 그 난장의 한복판에서도 같이 웃게 된다. 그렇게 웃고 나면 달라진 것 없는 상황이 조금은, 더 나아진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미쓰 홍당무와 안은영의 일기장
책에는 중간중간 감독의 짧은 일기들이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중 내가 좋아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 책이 나온 건 이경미 감독의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 나온 지 한참 전이지만, 드라마를 본 후 다시 보니 어쩐지 “X발, 다들 졸업해버려”라고 말하던 안은영이 떠오른다. <미쓰 홍당무>의 양미숙과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 모두 거칠고 이상한 동시에 친근한 면이 있는데, 감독의 일기도 비슷하다. 내 속 마음 같은 이 일기들 덕분에 감독의 이야기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공감이 간다.
뜬금없는 TMI이지만, 나는 나의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만큼 다른 이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 노트북을 빌렸는데 마음대로 여러 폴더를 열어본다든지, 다이어리를 두고 갔는데 몰래 읽어본다든지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이경미 감독의 일기장이 눈앞에 있다면 손대지 않겠다고 장담은 못 하겠다. 감독님이 들으면 이런 말이 괘씸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감독님, 감독님도 박찬욱 감독님의 '통마늘 엑기스'를 몰래 드신 적 있다고 하셨으니 부디 선처를 바라요......
친동생이 그려준 일러스트
이 책의 매력 중 하나는 곳곳에 실려 있는 일러스트들이다. 자신감 없어 보이는데도 귀여운 이 일러스트를 그린 이경아 작가는 이경미 감독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본문에서 밝혀진다.
물론, “얘랑은 딱 이번 연재까지만 같이하고 그만둬야지.”라고 쓰신 걸 보면 그 협업도 아름답게만 이루어지진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고생하신 것 같은 두 분께는 죄송하지만, 글과 그림이 아주 찰떡같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독자로서는 이 다짐도 망해서 또 다른 합작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쓰다 보니 감독님을 열 받게 하는 리뷰를 써버린 것 같은데......
그니까 이 책이 어떤 책이냐면
나는 이 책을 2년 전쯤 중고서점에서 샀다. 당시에는 이경미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었지만, 평소 좋아하던 공효진 배우가 인스타그램에서 추천한 책이라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서점에서 마주쳐서 샀던 기억이 있다.
해당 서점에서 진행하고 있던 이벤트였는지, 내가 산 책의 첫 페이지에는 책의 다음 주인에게 전할 말을 짧게 적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구구절절 썼지만, 이 한마디보다 더 이 책을 잘 설명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니까 누군가 들려주는 솔직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감독의 팬이라면 영화와 많이 닮아 있는, 조금 기괴하면서도 웃기고 사랑스러운 이 이야기 역시 마음에 들 것이다. 감독의 팬이 아니라면, 아마 나처럼 책을 읽고 빠져서는 감독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될 테니 당신이 미리 넷플릭스와 왓챠를 구독해뒀기를 바란다.
[조예음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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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윔지
- 2021.05.21 15: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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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미 감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끌리는 책이네요. 서점에 가면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척 하지 않는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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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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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음
- 2021.05.22 2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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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윔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을 좋아하신다면 책도 마음에 드실 거에요! 읽으면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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