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운명과도 같은 엘 그레코, 도메니코스: 도서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글 입력 2021.05.1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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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여행하며 미술관, 박물관을 많이 다니던 때에 한 번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면 어떤 기분일까. 어둠 속에서 이 회화작품을, 이 조각상을 보는 건 어떻게 와닿을까.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어서 그저 한 순간 떠올랐다 사라진 생각일 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을 특별한 사람을 초대해 실제로 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프랑스 스톡 출판사에서 기획한,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프로젝트다.


도서출판 뮤진트리는 이번에 이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프로젝트를 통해 나온 두 권의 책을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다룬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과 피카소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기록한 '여자를 삼킨 화가, 피카소'다. 이 흥미로운 두 권의 책 중에서 내 손길이 먼저 닿은 것은 도서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책 소개에서 본 저자 레오노르 그리고 그를 사로잡은 엘 그레코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같은 무언가를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 책 소개 >


한여름, 유럽에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소설가인 레오노르 드 레콩도는 파리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한다. 마드리드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톨레도에 도착한 후에는 성당 두 곳을 들르고 바쁘게 도시를 탐색한다. 그리고 밤 11시, 드디어 도메니코스를 만나러 엘 그레코 미술관에 도착한다. 

 

프랑스 스톡 출판사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시리즈를 기획하여, 작가 또는 예술가가 미술관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화가 또는 작품들을 모티브로 한 에세이를 쓰게 했다. 이 책의 저자 레오노르 드 레콩도가 오늘 밤 만날 사람은 엘 그레코이다.

 

1541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난 도메니코스와 1976년 파리 12구에서 태어난 레오노르. 그녀는 엘 그레코와의 사이에 놓인 4세기라는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짓누르는 듯한 열기, 어둠에 싸인 미술관, 경비원들의 주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탄복해온 이 화가와 사랑의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한다. 비의秘儀적인 메아리와 시정이 가득하고 가족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고 유령들이 찾아오는 밤에 흥분과 열정을 느끼며. 레오노르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대에는 특이하게 여겨졌던 이 화가를 열렬히 소환한다. 과연 그가 올까?

 




저자 레오노르 드 레콩도는 어떻게 엘 그레코에게 사로잡혔나. 사실 그의 배경을 보면 크게 놀랍지 않다. 아버지는 스페인 미술의 전통을 이은 화가였고 어머니는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레오노르의 부모님 모두가 예술가였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예술과 친밀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부모님이 각자 작품활동을 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조언하는 모습들을 보며 자란 게 어린 아이의 감수성 함양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지. 그런데 그는 부모님과 동일한 미술 분야로 진출하지 않고 음악가로 성장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부모와는 다른 영역의 예술가로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날카롭게 눈을 벼리는 법'과 인문학적 소양을 활용하여 작가로서도 활동해왔다.


레오노르는 미술관에서의 하룻밤 프로젝트를 하기에 앞서, 이미 15년 전에 톨레도를 다녀온 바 있다. 부모님과 함께 톨레도에서, 특히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 엘 그레코라 불리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의 작품들을 날카롭게 살펴보았다. 예술가 부모님과 함께 감상했기 때문에, 비록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아마도 저자는 부모님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며 이해와 감상의 폭을 더욱 확장시켰을 것이다. 레오노르는 책 속에서 명확하게, 이해력과 성찰력을 길러주는 시선으 교육을 믿는다고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즉 엘 그레코인가에 대한 답변은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도서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의 후반부에서, 레오노르는 이를 밝히고 있다.


 

"도메니코스, 내가 당신을 보러 톨레도에 온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다른 길들을 모색하는 것이에요. 나의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내가 그 수첩을 발견한 순간을 회상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서랍 깊숙한 곳에 수첩이 있었어요. 잊힌 수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아이였을 때 랑드의 황폐한 농장에서 사용하던 수첩이죠."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140쪽 중에서

 

 

레오노르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를 모사한 아버지의 수첩을 발견한다. 흔한 농가의 평범한 어린 아이였떤 아버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도메니코스, 그리고 아버지의 소명과도 같은 자취들을 보며 레오노르는 자신마저 도메니코스에게 빠져들고 말았따. 그래서 그는 스스로, '그 강박을 가까이 보기 위해서' 톨레도에 왔노라 고백한다.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 그와 마주할 순간을 기대하면서.


*


레오노르를 이토록 휘어잡은 엘 그레코,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는 그의 화풍만큼이나 독특한 사람이다. 스페인어 El에 이탈리아어 Greco를 조합하여 엘 그레코라는 별칭이 붙여졌는데, 그 별칭의 뜻은 '그리스 사람'이다. 도메니코스는 크레타 섬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가 집안에서 유일한 화가로, 정확히는 이콘화 화가로 활동해왔다. 그러나 도메니코스는 크레타 섬에서만 살기엔 열정이 컸다. 그는 이콘화라는 한정된 영역에서 벗어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사랑했던 아리아나조차 무심하게 버리고 베네치아로 떠났다. 자신의 아이를 유산한 아리아나를 떠나 기회의 도시에 정착해 세상의 기적을 만끽하던 그에게 아리아나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그는 그 순간 자신이 다시는 크레타 섬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화가로서는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받지만 인간적으로는 비겁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는 크레타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와 베네치아, 로마에서 10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 10년의 세월은 그에게 화가로서 큰 성공을 안겨다 준 시간은 아니었다. 비록 그에게 그림을 주문하는 사람은 없었을 지언정, 도메니코스는 이탈리아에서 라틴 방식을 배웠고 지식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런 그에게서는 점점 고대의 규칙에서 해방된 색과 터치에 대한 갈망이 드러났다. 전통적인 것보다 혁신적인 것에 더욱 열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도메니코스는 미켈란젤로를 두고 '예의는 바르지만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라는, 역사에 길이 남는 한 마디를 남긴다. 거장에 대한 거침없는 이 언사 때문에, 그는 결국 이탈리아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로마에서 떠나 스페인으로 간 도메니코스는 먼저 마드리드에 도착했따. 그러나 당시 마드리드는 수도가 된지 얼마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도시의 환경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서 도메니코스는 구 수도인 톨레도로 향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종교 중심지이자 부유한 도시인 톨레도에서, 도메니코스는 드디어 뿌리내리고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예술가로서 인정 받으며 수많은 그림 주문들이 그에게 쏟아졌고, 두번째 사랑 헤로니마를 만나 아들 호르헤 마누엘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뒤 3일만에 헤로니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를 두고, 레오노르는 그가 예르모 안으로 들어갔따고 표현한다. 이는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그 속에서 다른 것을 다 비워내고 온전히 홀로 나아가는 것이다. 도메니코스는 바로 그 고독을 표현하는 것에 온전히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을 버린 대가를 사랑을 잃음으로써 혹독하게 치른 그에게 남은 것은 그의 아들 호르헤 뿐이었다. 그래서 도메니코스는 작품 속에 아들을 담았고 또 그림을 가르쳐 자신처럼 화가로 성장시켰다. 그렇게 독창적인 화풍으로 톨레도에서 명성을 얻었던 도메니코스는,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로서 생을 마감했다.


*


이런 도메니코스의 삶에, 예술가적인 배경과 양분이 풍분했던 레오노르가 불꽃처럼 꽂힌 것도 특이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레오노르 본인은 프랑스인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이 조국이었다. 그래서 레오노르는 프랑스적 감수성을 담지한 동시에 아버지의 조국 스페인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생전 아버지와 함께 엘 그레코 미술관에서 도메니코스의 작품들을 감상했던 것과 아버지의 사후에 발견한 수첩 속 도메니코스 작품 모사로 인해, 저자 본인의 표현 그대로 '강박'에 가까운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금 엘 그레코 미술관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불꽃과도 같았던 엘 그레코, 도메니코스가 자신에게도 다시금 불꽃으로 다가온 그 순간을 어떻게 직접 온몸으로 맞서지 않고 배길 수가 있을까.


다만 저자 레오노르가 엘 그레코, 도메니코스와의 만남을 에로스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왜 도메니코스와의 진솔한 만남을 꼭 사랑을 나누는 뜨거운 하룻밤에 빗대어 표현하는 걸까. 그와 마주하는 것은 완벽하게 플라토닉한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건만, 그가 에로스적인 무언가로 묘사하는 대목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오노르는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유령이 자신과 함께 하는 것처럼 표현하는데, 유령이라고 표현되는 그 인물들에게 그만큼 뜨거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인가 하는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개인적으로 마음 속으로 아끼는 예술가에 대해서 이런 식의 접근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레오노르가 거침없이 표현하는 에로스적인 독백들이 너무나 생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레오노르가 자신의 시선과 도메니코스의 삶을 오가며 진정으로 도메니코스의 예술을 갈망했다는 점이다. 엘 그레코라는 이름이 더 깊이 남아서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라는 그의 이름은 사실 대부분에게 덜 익숙할 것이다.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엘 그레코의 삶에 대해서, 그리스 출신이지만 이탈리아를 거쳐 스페인으로 넘어가 작품활동을 했으며 세잔과 피카소 등 후대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선구적인 인물이었다는 것까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딱한 텍스트로만 와닿았던 엘 그레코, 아니 도메니코스의 삶이 레오노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동감 있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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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덮었다. 불현듯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저자 레오노르가 도메니코스에게 가진 그 열망과 환희가 내 가슴 속에 전이된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그의 삶을 피부로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건만, 레오노르의 글을 통해 나는 엘 그레코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도메니코스와 만난 것 같았다.

그의 삶이 단순한 글이 아니라 마치 영화처럼 내 뇌리 속을 파고들었고 보지도 않은 그의 시선에 공명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듯했다.


평범한 농가의 아이에게 영혼의 불을 붙였던 도메니코스, 그 아이가 장성하여 낳은 딸에게 다시금 소명과도 같은 무언가를 불어넣은 도메니코스.

그들에게 뜨거운 영혼의 불꽃으로 타오른 도메니코스가, 도서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통해 나에게도 열화와 같은 운명으로 불타올랐다.


 



어둠이 내게 가르쳐준 것

- 톨레도, 엘 그레코 미술관 -


지은이 / 옮긴이: 레오노르 드 레콩도 / 최정수

출판사: 뮤진트리


분야 : 예술_미술

페이지: 160쪽


정가: 13,000원

ISBN: 979-11-6111-069-1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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