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생관과 죽음관의 변화는 서로 꼬리를 물고 - 죽음의 춤

세실리아 루이스의 어른을 위한 그림책 '죽음의 춤'을 읽고
글 입력 2021.05.0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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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죽음의 춤 표지.jpg

 

 

죽음의 춤 혹은 죽음의 무도. 몇백 명의 사람들이 집단 광기에 사로잡혀 죽을 때까지 춤을 췄다고 하는, ‘당스 마카브르(Dans Macabre)’.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사람들은 왜 춤을 췄는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건 없다. 단지 페스트가 휩쓴 유럽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다.


제목이 이렇다 보니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지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가늠이 잘 안 됐다.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세실리아 루이스는 이 그림책에서 숱한 죽음을 다룬다. 그런데 그 죽음들이 대개 허탈하고 공교롭다. 정말 이렇게 죽었다고? 하필 그걸로 죽는다고? 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죽음들. 그 후에 어찌 되었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 책에는 의도적으로 죽음 직전의 배경과 사인만이 단출하게 적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바리톤 성악가 레너드 워런은 오페라 <운명의 힘>에서 돈 카를로를 연기하던 중에 죽었다.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라고 제3막의 아리아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 57P

 


한 사람의 죽음이 한 쌍의 글과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마치 빛바랜듯한 저채도의 색감, 얇고 성글어진 가재 천을 덧대고 색상판을 찍은 듯한 질감이 돋보인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지만 또 아주 음울하진 않다.


작가는 한정적인 색조를 사용했다. 녹색 계열에서 청록색 계열, 그리고 갈색 계열의 색상이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흰색과 검은색이 종종 사물이나 구름 같은 자연물에 사용되었다.

 

 

[크기변환]색조.jpg

 

 

서구 문화에서 초록색은 독극물과 연관되어 죽음의 색이나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인다. 갈색은 내게 바니타스화를 연상시켰다. 바니타스는 라틴어에서 무상함, 공허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니타스화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정물화의 한 종류인데, 인생의 무상함을 주제로 한다.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삶의 덧없음을 일깨우고 인간이 진정 추구해야 할 바를 성찰하게 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림의 주조색이 하필 이 두 가지 색이다 보니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앞서 언급한 의미와 통상적으로 대응하는 색상-형형한 녹색과 바니타스화의 짙은 고동색-에 비하면 이 그림책에 쓰인 색은 다들 옅고 가볍다. 너무 어둡지도, 비장하지도 않다. 이런 색의 쓰임에서 죽음에 대한 작가의 관조적인 시선이 엿보인다. 허탈하고 황당한 사인들을 모아 놓았을지언정 그것을 너무 비극적으로 보지 않았고, 웃음거리로 소모할 마음도 결코 없는 것이다.


글 옆 페이지에 자리한 그림은 꼭 죽음의 순간만을 담지 않았다. 청중이 존경의 의미로 던진 옷에 깔려 죽은 드라콘의 경우 죽음의 현장을 담았고, 독수리가 던진 거북이 등껍질에 맞아 죽은 아이스퀼로스의 경우 죽음 직전 장면을 담았다. 자기 몸의 특징 때문에 죽거나 주변의 물건에 깔려 죽은 이들의 경우 그들의 사인을 품고 있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내게 인상 깊은 그림은 이사도라 던컨의 죽음에 할당된 것이었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고, 그의 죽음마저 허탈하리만치 평범치 않았으니. 햇빛이 들어오는 평온한 방 안에 급히 나가며 목을 감쌀 스카프 하나를 챙겨나가는 팔이 보인다. 이사도라 던컨의 팔이다. 출근길에 외투를 급히 걸치고 나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다를 게 없다. 방 안에 들이치는 햇빛은 또 어쩜 그리 한가로운지. 그러나 그 빛줄기 아래 화병에 꽂힌 식물은 던컨의 죽음을 암시하듯 시들어 있다. 던컨은 평소처럼 외출하면서 고른 스카프 한 장에 목숨을 잃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나는 이 그림에서 아마도 저자가 말하고자 했을, 죽음의 일상성이 가장 와 닿았다.

 


[크기변환]던컨.jpg

 

 

일반적이고 이상적인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흔히들 연로하신 지인이 자다가 돌아가셨다면 호상이라고 한다. 내가 어릴 적 상상하던 나의 죽음의 모습은 머리가 희끗할 정도로 나이 들고 나서 집이나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데, 나의 가족들이 그런 나를 보고 있고, 잔잔한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 평온히 눈을 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분히 헐리웃 가족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그런….


어쨌든 그런 장면이 영화에 긍정적인 죽음으로 그려지는 데엔 사람들의 보편적인 바람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일굴 만큼 일궜고, 말년에 미움받는 일 크게 없고, 자기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나이에 고통을 오래 겪지 않고 죽는 것. 그게 당사자에게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납득 가능하고 너무 슬프지 않은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가 있다.


지금은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의외로 가족 내 연장자의 임종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체적 고통 외에도 저마다 품고 있었던 소원이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 건 어떤 고통일까를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결혼관도 바뀌었다. 무엇보다 죽음은 출생처럼 내 뜻으로 이뤄지지 않으니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일이 다소 부질없기도 하다. 다만 죽기 전에 삶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은 있길 바라고 너무 허탈하게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허탈한 죽음의 연속을 보고 나니 죽음에 대한 지각이 또 한 번 미세하게 변동했다. 누구나 삶을 돌아볼 시간 없이 죽을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누군들 자기가 이런 식으로 죽고 기록될 줄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허탈한 죽음이 모두 허망한 죽음일까? 죽음 자체보다는 삶이 거기서 멈춤으로써 삶을 더 이을 수 없다는 점이 내게는 더 허망하게 다가왔다.


죽는다는 사실에 골몰하면 그 공포로 살아갈 수가 없고, 죽음을 아예 잊고 살면 삶의 밀도가 낮아진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나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허무로 남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삶의 태도에 대해 고민하던 것과 이 책에 대한 소감이 맞물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항상 깨어 있는 건 무리여도 자주 깨어 있는 삶을 살자. 사람은 자신의 탄생도 선택할 수 없고 언제 죽을지도,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 채 살아가니까 적어도 이 순간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감정이 어떤지는 알고 살아가자고.


일의 균형과 휴식의 균형, 내 미래를 위한 일과 현재의 나를 위한 일의 균형, 내가 복기하지 않아야 하는 과거의 일과 생생히 펼쳐서 앞날의 길잡이로 삼아야 하는 감정 간의 균형을 잡는 일. 물론 바삐 지내다 이 생각을 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서투르게나마 오늘도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후회 없이 살려면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까.


세실리아 루이스가 <죽음의 춤>에서 죽음을 관조하는 시선은 결국 죽음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삶을 소중히 대하라는 결론에 닿아 있을 것이다. 그 시선에 화답하는 내 감상은 깨어 있는 삶에 대한 소망으로 반응했다.

 

 

[신성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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