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음의 춤 [도서]

글 입력 2021.05.02 00:1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완벽하지 않은 것으로 태어나 완벽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일이건 공부건 간에 내 마음에 쏙 드는 결과물을 얻었을 때 “이 정도면 완벽하지.” 따위의 말을 곧잘 한다. 그 완벽한 과제를 상사나 교수님, 혹은 조교에게 가져갈 때마다 무참하게 박살 나면서도 다음에 또 그런 말을 한다.

 

세상에 완벽한 게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허비한다. 완벽하지 못하게 태어났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음 = 삶



 

나는 탄생도 보았고 죽음도 보았는데

그 둘이 다른 줄만 알았다.

 

-T. S. 엘리엇-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이 나보다 나중에 죽을 수도 있고, 나보다 늦게 태어난 사람이 나보다 빨리 죽을 수도 있다. 삶과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면 삶의 순서를 알 수 없다. 영화 ’인 타임’처럼 주어진 시간이 손목에 표시되는 세상이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 본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가 언젠가는 온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생명이 태어나는 이유는 명확하지만 사라지는 이유는 꽤 다양하다. 죽음에 대한 경우의 수가 월등하게 많아도 우리는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생명이 어떻게 탄생하는 것인가에 관해서만 두꺼운 책을 들이밀며 교육한다. 언제가 누군가의 시작을 만들어 낼 사람이 되는 준비를 할 수는 있지만, 막상 지나버린 내 시작은 대비를 못 한다. 내가 대비할 수 있는 것은 끝뿐인데 그건 알려주지 않는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내가 이미 알고 익숙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두려워한다. 두려워서 피하기 바빠 미리 알아두고 대비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교육 방식 덕분에 삶의 시작은 잘 알지만 어떻게 끝나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죽는지, 어떻게 죽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죽는 날을 맞이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무서워한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죽음 =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사람 일은 모른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도 알 수 없다. 당장 내일 죽는 일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확률이 낮을 뿐이다. 죽는 걸 두려워하면서 살라고 이런 말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고 무서워한다고 피할 수도 없으니 언젠가는 죽겠구나 하고 살아있는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해서다. 질병은 과학 기술을 동원해서 예방이나 치료가 가능한 약을 만들어 피할 수 있다. 안전사고는 내가 주의를 기울이고 보호 장구만 잘 끼면 피할 수 있다. 죽음은 못 피한다. 당장 비 오는 날 나갔다가 벼락 맞아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17.jpg

 

죽음의춤_내지6667.jpg


 

주식 시장에는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격언이 있다. 위험이 클수록 수익도 크다. 물론 성공했을 때 얘기다. 사는 것도 똑같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감수하고 세상으로 나갔을 때 더 많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벼락 맞고 죽을지도 몰라. 내 목도리가 버스 문에 끼어서 죽을지도 몰라. 지나가던 새 때문에 놀라서 죽을지도 몰라. 이따위 고민 아무리 해봐야 소용도 없고 시간만 낭비한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죽음은 못 피한다. 세상에 삶과 더불어 죽음이 있는 이유는 살아있는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고 즐기라는 뜻에서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살다가 떠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이득이다.

 

 

 

죽음 = 춤을 추자



알자스 지방의 스트라부르스에서 400명 정도가 춤을 추다가 죽었다. 왜 춤을 췄는지는 모른다. 그저 끝없이 춤을 추다 체력이 다 하거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와서 죽었다. 그 사람들은 죽음을 경배해서 춤을 췄을 수도 있다. 죽음이 두려워 기도의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반가워 환영의 춤을 췄을 수도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각자의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너무나 사랑하던 춤을 추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며 맞이하는 마지막보다 더 아름다운 마지막은 없다.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인생은 없다.


사람은 각자 좋아하는 게 다르다. 좋아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찾으려 노력했으면 한다. 이미 좋아하는 게 있다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 일을 가능한 많이 했으면 한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 어떻게든 미련을 안 남겨야 본전은 찾는다.

 

1년 뒤에 그 일을 하려다 그 전에 죽으면 끝이다. 내일, 아니 당장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다. 조금이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많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춤을 춰야 한다. 그게 죽음이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이유다.

 


죽음의춤_표지.jpg

 


죽음의 춤

 

세실리아 루이스 글∙그림, 권예리 옮김

 

분야: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 역사

 

80쪽 | 양장본 | 216*140

 

정가 16,000원

 

출간일 2021년 04월 16일

 

ISBN 979-11-961389-4-3 07900

 

 

[김상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