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매드 랜드' 그리고 노마드 [영화]

선택지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글 입력 2021.05.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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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개봉 날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가 절실했고, 마침 보고 싶던 <노매드 랜드>가 상영 시간표에 있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 외에는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영화가 내게 큰 숙제를 안겨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나고, 영화가 작품상, 감독상 등을 휩쓸 때까지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고 한참을 밀려버린 숙제를.

 

 

 

‘NOMAD’란


 

<노매드 랜드>는 ‘노마드(Nomad: 유목민)’의 생활을 현실적이고 섬세하게 담는다. 떠날 수밖에 없어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펀(프랜시스 맥도먼드)’과 그녀의 애정이 깃든 밴과 함께 미국 각지 캠핑장과 일자리를 떠돈다. 그 과정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사실 영화 초반부까지도 제목의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 ‘노매드 랜드’는 화난 사람이 없는 땅인가, 하고 혼자 생각했다. 노매드가 그 익숙한 ‘노마드’일 줄 모른 것이다. 본래의 뜻은 ‘떠돌아다니는 사람’이지만, 21세기 현상황에 맞게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디지털 노마드)로 뜻이 확장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원래의 뜻을 진득하게 밀어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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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가 집중하는 떠도는 사람에 대한 정의도 필요할 것이다. 먼저 떠도는 사람은 ‘홈리스(Homeless)’가 아니다. 마트에서 우연히 만난 옛 제자가 펀에게 ‘진짜 홈리스로 사냐” 묻자, 불편한 기색으로 “하우스리스(Houseless)와 홈리스는 다르지 않냐”며 되묻는다. 즉, 노마드는 집이 없지만 노숙자는 아니다. 머무는 곳, 자신의 공간은 확실히 있다.

 

집이 있을 때의 펀은 정착했지만, 밴을 타고 다니는 지금의 펀은 계속해서 이동한다. 예전의 펀은 취침, 식사, 세면 등 용도에 따라 공간이 분리된 곳에서 살았지만, 지금의 펀은 취침도, 식사도, 세면도 모두 한곳에서 해결한다. 우리에게 집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정착하는 것과 떠도는 것은 이런 차이를 낳는다. 누군가에게는 엄청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소할 수 있는 차이 말이다. 사람에 따라 집의 존재감은 막강해질 수도, 미미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집, 속박 혹은 안정감


 

20살에 본가를 떠나 온 내게 집은 항상 골칫거리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도 아닌데 집을 보듬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청소해도 뒤돌면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고, 먹고 싶어서 사 놓은 식자재는 먹어야 하는 것으로 바뀐다. 때때로 이유 없이 막히는 화장실 변기는 물 내려가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들고, 매달 날아오는 전기, 가스 등의 고지서는 언제나 숨통을 조여온다. 멀리 장기간 여행을 가고 싶어도 꼬박꼬박 나가는 월세가 아깝고, 지금 사는 곳을 떠나고 싶어도 계약 기간에 발이 묶인다.

 

물론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그 어떤 단점과도 견줄 만하다. 대학 기숙사에서 1년을 살고, 셰어하우스에 1년 살아 본 결과,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숙사에 살 때는 룸메이트와 소등시간을 맞추는 것이 소소한 스트레스였고, 셰어하우스에 살 때는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큰 스트레스였다(같이 사는 집주인 할머니께서 초반에는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시지 않고 열쇠로만 들어오라고 하셨다).

 

지금 사는 집은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갖게 된 나만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내가 원하는 시간까지 불을 켜 놓을 수 있고, 통금시간 없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친구를 불러 놀 수도 있고, 눈치 보지 않고 음악을 틀고 기타나 피아노를 칠 수도 있다. 벽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포스터와 엽서가 잔뜩 붙어있고 큰 고민 없이 질러버린 5단 책장에는 조금씩 사들인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다.

 

나는 1년 넘게 살고 있는 이 집을 좋아하고, 원한다면 2년 계약 기간을 채우고 연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원히 진짜 ‘내 집’이 되진 못할 것이다.

 

 

 

내 집 마련의 꿈


 

최근 몇 년 동안 집값은 ‘뜨거운 감자’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있다. 치솟는 집값 때문에 넓디넓은 땅에서 내 집 하나 마련해보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분명 서울 땅에 있는 수많은 빌딩도 주인이 있을 터인데, 다 누구의 것이란 말인지, 그중에 내 것은 왜 없는 것인지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럼 언제부터 ‘집’이라는 것을 가지려고 애를 썼을까? 돌을 떼어내어 무기를 만들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에 알맞은 곳을 찾아 이동 생활을 했다. 하지만 약 기원전 8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들어서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한곳에 정착하게 된다. 강가나 바닷가에 지은 ‘움집’에 말이다.


집을 갖게 된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규범과 질서를 가르친다. 집은 단순히 주거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출생과 성장이 이뤄지는 곳이며 그 과정에서 추억이 투영되는 공간이다. 특정 시절, 가족 혹은 다른 이들과 함께하며 차곡차곡 쌓아낸 추억이 집에 대한 애착을 만든다. 내 공간을 내 취향대로 꾸밀 수도 있고, 잠깐 떠나더라도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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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정과 평온이 깃든 집은 때로는 불안과 위협이 편재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집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는 이상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마다 새로운 집을 찾아야 한다. 현재는 정착해있지만, 떠나야 할 근미래를 생각하면 안정감과 초조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수도권에서 20평대 아파트를 구매하려면 기본 2억 이상. 예금으로만 돈을 모은다고 가정했을 때 월 200만 원을 저금하면 2억을 만들기까지 약 9년이 소요된다. 금수저나 고연봉자, 벼락부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최소 9년 이상 떠돌 수밖에 없는 신세다.

 

집의 희소성은 늘 집을 열망하게 만든다. 어쨌든 집은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기에 ‘내 집 마련’에 더 힘쓸 수밖에 없다. 그 사이 가치 전도 현상이 일어난다.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도구 중 하나인 집이 어느새 삶의 목표가 되어버리는 순간도 종종 있다. 집을 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것들도 많다. 시간, 건강, 관계 등등. 집은 우리를 어떤 굴레에 던져 놓고 끝없는 레이스를 시키는 것 같다.

 

집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재력은 필수다. <노매드 랜드>에서 펀은 집이자 이동수단인 밴이 고장 났지만 당장 수리할 돈이 없어 발이 묶이기도 한다. 언니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것을 잠시 멈추고 언니 집에 머무르게 된다. 펀이 일하지 않고 떠돌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야영비, 기름값, 식비 등을 벌기 위해 아마존 물류센터, 패스트푸드점, 공사 현장 등을 전전한다.

 

 

 

꼭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


 

행복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잡지 ‘베어(Bear) Vol. 17: NOMAD’에서는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떠돌아다니며 돈을 버는 사람들이 나온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산 이 잡지는 영화를 현실적으로 부연 설명해주었다. 일반적으로 여행하고 떠돌며 돈을 버는 방법은 유튜브 방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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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life Korea 수향’ 채널을 운영하는 김수향은 캠핑카로 여행하는 일상을 올리고, 구독자50만명이 넘는 여행 유튜버 ‘여락이들’은 더티와 그래쓰 두 사람으로 시작해 차차 크루를 만들어 여행하는 모습을 올려 광고 수익금을 받는다. 아니면 사진작가 이종범(@pikn2k)처럼 인스타그램을 활용해 돈을 벌 수도 있다. 집과 직장을 오가며 월급을 받는 것 외에도 돈을 버는 경우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어떤 식으로 돈을 버느냐, 어떻게 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자기 확신이다. <노매드 랜드>에서 펀은 처음에는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마을에 있던 탄광이 폐쇄돼 마을도 위태로워지고, 남편까지 잃어 더 이상 집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 중후반부까지만 해도 펀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물결 같은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로 고향을 떠난 것인지 일련의 사건들에 등 떠밀려 떠나온 것인지 확신이 없는.

 

펀은 여행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한층 더 성숙해진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확신도 갖게 된다. 그래서 안정적으로 정착할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떠나는 것을 택한다. 펀은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는 사람’으로 바뀌어 간다.

 

펀을 보고, ‘베어: NOMAD’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생활양식에는 정답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사실인데 사회는 아늑한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이 ‘디폴트(Default)’인 것처럼 교육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교육은 우리의 선택지를 좁히고, 더 넓은 공간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디어를 통해서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비쳤으면 한다. 취향을 지키고 집을 포기한 채 달팽이처럼 살아가는 <소공녀> 미소처럼, 아르바이트 4개를 할지 언정 직장에 얽매이기 싫은 <도시남녀의 사랑법> 서린이처럼 자신만의 인생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비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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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떤 선택을 하건 자신의 몫이다. 사회가 내민 선택지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할 수도 있고, 선택지 자체를 구겨버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다 싶으면 선택을 번복할 수도 있다. 유튜버 ‘여락이들’ 멤버 더티의 말처럼 “모든 상황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는 것. 나쁜 일이 끝까지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좋은 일이 끝까지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그저 자신을 믿고 삶의 여정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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