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적 사업과 사업적 예술 사이의 어딘가 - 앤디 워홀 : 비기닝 서울

글 입력 2021.04.18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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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에 대한 첫인상은 내가 18살 쯤 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멋도 모르고 짚어 들었던 책 <발칙한 현대미술사>는 현대미술 앞에는 '발칙하다' 만큼이나 적절한 형용사가 없음을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생각에 크게 일조한 이는 다름 아닌 앤디 워홀이었다.

 

해당 책에는 앤디 워홀의 대표적인 작품 『캠벨수프 깡통』에 얽힌 놀라운 뒷이야기가 실려 있다. 똑같은 깡통 그림 여러 개를 주욱 이어 붙인 형태의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의 대량 생산 체제와 소비주의적 풍토를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아주 일상적인 소재의 그림 수십 개를 이어 붙인 이미지를 통해 관람자는 금새 그 풍자적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사실 제각각 독립적인 32점의 그림이었으며, 그것을 하나로 연결해 작품화하게 된 것은 타인의 충고에 의한 것이었다. 『캠벨수프 깡통』의 가장 중요하고도 전위적인 요소가, 워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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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입장하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마릴린 먼로 실크 스크린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면화'라고 하는 그만의 독창적인 구성 방식도 워홀의 생각이 아니었다. 온전한 프린트와 색상 반전이 큰 프린트, 그리고 비교적 흐린 프린트 등을 병렬적으로 붙인 것은 그저 그림을 사러 방문했던 고객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그 화상이 없었다면 마릴린 먼로의 실크스크린 시리즈가 이토록 가치 있게 여겨졌을 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꽤 큰 충격으로 다가온 일화였다. '현대미술의 방점은 아이디어에 있지 않나? 워홀의 작품은 온전히 워홀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아닐까?'부터 시작해 '예술가의 예술성을 어디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하는, 다소 깊은 사유까지 넘어갔다.

 

<앤디 워홀: 비기닝 서울> 전시를 찾은 이유는 이와 맥락을 같이 했다. 고등학생의 내가 봤던 워홀은,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의 눈에 비치고 서술된' 워홀은 예술을 앞세운 사업가였다. 이번 기회를 통해 워홀이 직접 말하는 워홀을 목격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의 작품 앞에 직접 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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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관람을 마친 단편적인 감상은 다음과 같다. 워홀은 현대미술의 현대성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한 작가임을 실감했다. 아니, 오늘 날과 같은 현대 미술이라는 정의가 전무했던 시기이니, 그 현대성을 만들어간 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현대미술이 자본과 브랜드화를 그 큰 근본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고, 워홀은 이를 이용해 자신의 꿈을 실현했을 뿐이다.

 

전시의 여섯 단계 구성은 그의 다양했던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사회적 이슈, 음악이나 영화 등의 대중 문화는 물론 심지어 자연에까지 관심을 두고 작업을 이어간 그의 행보를 관조할 수 있는 구성이다. 미술은 더 이상 캔버스와 물감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느낀 동시에, 그가 사용하는 예술적 방식은 모두 기존의 방법을 근본에 둔 일종의 변형된 형태임을 깨닫기도 했다.


 

미래에는 모든 사람들이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

In the future, everybody will be famous for fifteen minutes.

 

- 앤디 워홀

 


한 가지 인상적인 점은 그의 작품 세계부터 그가 남긴 말, 사유의 흔적 모두가 하나의 일관성을 띈 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축하자면 '전위성'이 아닐까. 다다이즘에 큰 영향을 받은 예술가답다. 미술만의 전유물처럼 느껴졌던 유일성을 파괴하고, 복제품의 이미지를 통해 일상적 오브제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하고, 작품에 '이것은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기재하며, 자신의 작업실을 '팩토리'로 명명하는 순간 워홀은 스스로를 사업가이자 공장장으로 정의한다.

 

사업가는 어째서 예술가가 될 수 없는가? 그는 분명 캠벨수프 깡통이라는 완전한 예술품을 수십 수백 개나 만들 수 있는데. 이것은 예술가를 넘어서 마술사의 경지가 아닌가. 워홀을 닮은 그런 유쾌한 생각이 관람 내내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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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예술적인 사업가와 사업적인 예술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미술에 뼈와 살을 붙인 인물로서 앤디 워홀을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시를 통해 참 워홀답다고 느낀 것은 그가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이었다. 즉, 금전적 성공을 바란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것만큼이나 원초적이고 솔직한 욕망이 어디 있는가. 예술이 고고한 가치만을 역설하는 순간 그것은 누군가의 전유물이 되고, 권력 구조를 형성한다.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현대미술의 현대적 가치를 꿈꿨던 워홀은 그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또한 워홀은 자신의 작품에 이면이나 속뜻은 없다고 천명했다 한다. 표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화려한 색감과 워홀 특유의 직설적인 색감, 복제되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이미지성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 감각만 존재한다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 느낀 그대로를 말하는 것. 이를 통해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문화 예술의 장을 만드는 것. 어쩌면 그는 현대미술이 새로운 아고라를 형성할 것이라 기대했는 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갑뿐 아니라 마음까지 부자인 예술가의 전형을 꿈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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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 위치한 더 현대 서울, ALT 1 전시관에서 열리는 <앤디 워홀: 비기닝 서울>은 워홀의 정신처럼 깊은 예술적 사유의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매력있다. 미술관은 여타 문화 공간들에 비해 '뭔가 좀 아는 사람들'만,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들만 가는 것 같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느낀다. 해서 대중적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앤디 워홀: 비기닝 서울> 전시는 분명 눈이 즐겁고 생각이 즐거운 전시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성으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작품에 깃든 다양한 에피소드까지 즐길 수 있으니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가졌던 워홀에 대한 여러 의문점을 해소하는 좋은 기회였단 점에서 무척 인상 깊게 관람했다. 앞서 언급했던 워홀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던 그의 작품 속 여러 요소를 막연히 비난할 수 없는 이유도 깨달았다. 워홀은 애초에 작품이 예술가에게 종속된 전유물이 아님을 얘기하고 있는, 아주 예술적인 사업가이자 사업적인 예술가이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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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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