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상과 야경의 상관관계 [도서/문학]

글 입력 2021.04.1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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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을 내려다 보는 것이 한창 취미였던 적이 있었다. 평생을 갖지 못할 강남의 고층 빌딩도, 머리가 두 개는 차이 나는 어른들도, 반지하 방 천장에 앉은 날파리도, 내겐 평생 올려다보아야 할 것 투성이라 느꼈으니 명목은 충분했다.


'낙차'. 처음 성인이 되어 서울로 올라온 나에게는 평생 그것에 짓눌려 살 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배적이었다. 도시가 요구하는 속도감에 숨이 막히기도 했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압력은, 성인으로서의 낯선 부채감은 쌓여만 갔다. 동시에 사회를 위계짓는 수많은 종류의 층위와 그들 사이의 낙차를 실감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썼고, 매일 알 수 없음만 늘어났다. 어른이란 응당 이 모든 '알 수 없음'을 버티고 사는 존재일지, 아니면 그것의 모순을 완전히 잊고 지내야만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건 지 고민했다.


아래에 고인 나로서는 밀려오는 것들에 속절없이 휩쓸릴 수밖에 없겠구나. 고인 것들은 쉽게 문드러지고 악취를 풍길 텐데. 자주 관념에 빠지다 못해 절여지는 나로서는 우울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 필요했다. 무언가 현실적인 방안. 그래서 야경을 선택했다. 낙차에 대한 저항이 높은 곳에 오르는 형태로 실현된 것이다.

 

일단 야경을 목적으로 하고 나면 발걸음에 무게가 덜어졌다. 휴대폰과 끝이 이상한 색으로 물든 립밤, 책 한 권, 지갑을 챙긴 작은 가방을 매고 나는 온 밤을 헤집고 다녔다. 일상에서 이상을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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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내가 떠오른 건 오랜만에 펴 본 이상(李箱) 작품집 때문이었다. 한국 문학사에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로서의 궤적을 그은 많은 이들에게 그러하겠지만 나에게도 그 존재의 의미가 크다. 이상은 100여년의 시차를 가볍게 뛰어 넘어 나의 일상에 주름처럼 끼어드는 문학가 중 하나이다. 그는 종종 내 손을 빌려 글을 쓰고, 내 입을 빌려 마치 연극 배우라도 된 듯 대사를 내뱉고, 내 머리를 빌려 많은 것들을 조소하는 동시에 현실의 굴레에 괴로워한다. 비유하자면, 영화 <조조래빗>의 꼬마 조조에게 히틀러의 존재 정도라 생각하면 될 거다.

 

한국 문학사의 대표적 아방가르디스트인 그를 이토록 일상적인 존재로 치부하다니, 누군가는 의아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생과 작품 세계를 속속들이 톺아본 자라면 아마 '덜 자란 어른'으로서의 이상이 지녔던 결핍과, 그 결핍마저 문학적으로 완벽히 승화한 그의 작품들에 감화될 것이다. 그는 단순히 플라스크나 각종 약품 대신 언어와 펜을 손에 쥔 문학 실험가가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를 살던 지식인, 아니, 그보다 먼저 인간 김해경(이상의 본명)이기도 했다.

 

아래는 이상이 타계 1년 전 발표한 연작시 「위독」 중 「절벽」이란 작품이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香기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穴을판다. 墓穴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香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墓穴을판다. 墓穴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墓穴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香기롭다. 보이지도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이상, 절벽(絶壁)

 

  

향기는 만개하지만 보이지 않는 꽃, 즉 기능하지만 가시화되지 않는 무언가와 자꾸만 묘혈을 파는 화자가 반복적으로 묘사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상의 작품 세계를 아우르다 보면 전위적인 문학가로서의 양상뿐 아니라 인간 김해경으로서의 모습 또한 눈에 띈다.

 

물론 언어의 투명성을 불신한 그의 작품은 시인의 생애와 무관하게 텍스트 자체로서만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시 <절벽>을 소개한 것은 기능적 분석이나 작품의 가치를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이상이 지녔던 죽음 충동과 낙차에 절망하던 내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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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야경과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나는 틈만 나면 야경 명소로 이름 난 곳을 검색해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것마저 동나자 후에는 높은 곳이라면 어디든 오르고 봤다. 잠금화면은 질 나쁜 색감의 밤 풍경으로 고정됐고, 부족한 잠에 얼굴은 누렇게 뜨기 일쑤였다. 낮이면 깜빡대는 형광등에 눈이 시렸다. 분명 친구들과 관광 목적으로 찾을 만한 곳들을, 어쩌다 꾸역꾸역 혼자 오르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든 알 수 없음은 오름의 동력이 되었을 지 모른다.

 

밤이 되면 일상의 낙차를 거슬러 올라간 나는 잠시나마 윗물에서 흐를 수 있음에 만족했다. 거대한 도시를 신처럼 관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승리감까지 들었다. 색색의 조명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는 가족, 맥주 한 캔에 담소를 안주 삼는 연인, 친구들끼리 관광 온 듯한 무리를 보며 잠시나마 풍경에 녹아들었다. 이상의 시 <절벽>처럼, 향기가 만개하는 꽃을 찾아 절벽에 오른 기분이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향기로웠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하는 감각이었다. 다시 길을 굽어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발을 내딛을 때마다 낙차의 압력은 되살아났다. 분명 향기는 만개했었고, 옷자락마다 그것이 진하게 배여 있는데도 난 꽃 한 송이 쥐지 못한 빈 손으로 길을 내려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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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시 <절벽>을 읽고 야경에 병적으로 중독됐던 그때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시는 어쩌면 매우 단순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지 않지만 향기 만큼은 만개하는 꽃과, 자꾸만 묘혈을 파고 그 속에 눕는 '나'가 교차된다. 시의 제목인 '절벽'은 화자가 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장소로 읽힌다. 흔히 절벽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곳, 낭떠러지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야경 중독의 경험 덕인지 나는 절벽이 '낙차'를 극대화한 소재라고 느꼈다.


인간은 양가적인 생각을 동시에 함에 괴로운 존재가 아닐까. 정상에서 바닥을 상상하고, 사랑에서 이별을, 자유에서 속박, 최선에서 최악을 가정한다. 영원에 대한 믿음도, 그것을 경험한 바도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시 <절벽>의 화자 역시 이들 사이의 낙차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는 절벽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를 맡는다. 그에 이끌려 온 발에 생채기가 나도록 절벽을 오른다. 마침내 꼭대기에 도착한 그는 꽃이 보이지 않음을 깨닫지만 단념하지 못한다. 향기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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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오감을 만족시키기에 아름답고, 눈으로 볼 수 없다면 향으로 감각하면 될 일이지만 불안은 가시질 않는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는 묘혈(墓穴)을 판다. 그것은 꽃을 닮으려는, 꽃 그 자체가 되려는 시도처럼도 느껴진다. 자꾸만 아래로 묘혈을 파는 행위는 마치 꽃이 뿌리 내리는 행위와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꽃을 '지각'하는 대신 꽃의 상태를 '체험'하는 방식으로 '나'는 양극단 사이의 낙차를 견딘다.


그러나 화자의 행위는 다소 모순적이다. 겨우 위로 올라온 상태인데 다시 묘혈을 파며 아래로 침잠하려 들다니. 나의 경우를 빗대어 보자면, 가파른 낙차는 견딜만 한 것이 못 된다. 우리의 발은 허공에 묶여 끊임없이 대롱대고, 그것은 곧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남기기 마련이다. 마치 야경에 중독됐었던 나처럼. 밤마다 높은 곳을 찾아 오른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다시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이 시는 죽음의 순간에서 희망을, 희망의 순간에서 죽음을 보는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아래에 고인 동시에 윗물이 가진 흐름을, 위에서 흐르는 동시에 아래로 쓸려 내려갈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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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명소는 금요일 밤이나 휴일에 특히 인파가 몰렸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난간에 팔을 걸치면 옹기종기 걸린 빨래라도 된 것마냥 기분이 축축했다. 그때의 나에게 한강은 무수한 이들의 한(恨)이 흐르는 강이었고, 남산은 남의 산이기보다는 온전히 내 것 같았다.

 

그러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뭐 하냐는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 눈 앞의 야경을 찍어 보낸 밤이었다. 곧 친구에게서 답이 돌아왔다. '와, 불빛 봐. 풍경 진짜 잔인하다. 서울 야경이 예쁜 이유가 야근 하는 인간들이 수두룩 해서잖아.'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겠지만, 그제야 야경의 폭력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득히 펼쳐진 야경 속에, 틈없이 끼어 있는 내가 보였다. 저 불빛 중 하나를 이룰 내가.

 

분명 만개하는 꽃 향기에 이끌려 그 많은 언덕을 굽이 올랐다 생각했는데, 내가 내고 있던 건 발자국이 아닌 묘혈이었음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날 계속해서 걷고, 오르고, 살게 할 것은 그 보이지 않는 꽃일 뿐임을 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묘한 '앎'과 '알 수 없음'의 간극을 견디고 살아야 할지. 지긋지긋하지만, 또한 낙차에게서 답을 구할 나를 상상할 수 있다. 일상과 이상의 낙차를 줄이고자 생각하고 읽고 쓰고 살아갈, 나와 우리를 말이다.

 

이제는 야경 없이도 잠에 들 수 있다. 묘혈 대신 꽃을 심을 구덩이를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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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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