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두만강(2009) [영화]

글 입력 2021.04.15 14: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두만강.jpg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연변 아이들은 밥은 먹을 수 있는 삶으로, 북한 아이들은 배고픔에 도강하는 삶으로 나뉜다. 연변의 이 작은 마을은 자꾸만 넘어오는 탈북자들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그들의 배고픔이 마을 식량을 도난하고 피해를 입히자 점차 적개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통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 그 사이에서 매번 강을 건너오는 강 저쪽 사람 ‘정진’과 연변 작은 마을 골목대장 창호는 점차 친밀해진다. 공존하기 어려운 이 장소에서 창호는 어떻게 정진과 함께할 수 있을까.

 

창호의 몸짓들은 자신이 체화하지 못하는 세계의 정진을 체험하고자 하는 과정이 된다. 창호가 타인을 체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매개로 행동하게 되는 반면 누나 순희는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육체를 침해당한다. 자신이 돕고자 했던 집단에게 도리어 나의 집단이 공격을 받게 된다면 이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나. 강을 사이에 두고 인물들의 몸짓들은 조금씩 다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얼어붙은 두만강이 보이고 영란과 촌장이 카메라로 다가오면 창호가 얼은 두만강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것이 보인다. 영란이 창호의 몸을 돌이켜도 아무런 움직임 없던 창호는 영란이 ‘창호 아닌가’ 묻자 그제야 일어나 도망치듯 벗어난다. 그다음에 붙는 장면은 세 명의 아이들이 언 강 위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미 창호가 죽은 척을 하다 멀쩡하게 일어나 도망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그 아이들 또한 금세 일어나리라 생각하지만 곧 공안에 의해 아이들이 강 밖으로 옮겨지자 우리는 그들이 진짜 죽었음을 깨닫는다.

 

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지리적 차이가 죽음을 흉내 내보는 아이와 진짜 죽는 아이들로 나누는 것이다. 가만히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던 창호의 모습은 그들과 똑같은 행위를 흉내 내며 그들을 감각하려는 것으로 느껴진다.

 

 

unnamed.jpg

 

 

창호는 정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 음식을 베풀고 같이 시간을 보낸다. 창호가 이렇게 정진과 가까워지는 반면에, 한쪽은 육체를 강탈당한다. 영화 중반부, 창호의 집에 한 탈북 남성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할아버지는 순희에게 이불을 내어오라고 한 다음 남성이 창고에서 하룻밤을 머물 수 있게 도와준다.

 

다음 날 아침 순희는 남성에게 식사와 술을 대접하고 티브이를 켠다. 티브이에서는 북한 지도자를 찬양하는 방송이 나오고, 순희는 티브이 속 사회가 자신의 사회와 조금 먼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감정의 동요 없이 방송을 바라본다. 무심히 앉아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순희 앞에서 탈북 남성은 밥을 먹다 말고 경기를 일으킨다. 탈북 남성에게 그 사회의 모습은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은 공포 어린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광기를 일으키는 이 장면이 타인은 평온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광분한 것인지, 남성은 마치 발악하듯 순희를 겁탈한다.

 

 

unnamed0.jpg

 

 

마을의 상황 또한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집집마다 명태가 사라지고 소와 양들이 도난당하면서 어수선해진다. 상점 집 철부 아버지는 그동안 몰래 탈북자들을 도와온 것이 발각돼 공안에 붙잡힌다. 이해하고자 했더니 오히려 자신의 마을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탈북자들로 인해 창호의 행동은 점차 변하게 된다.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던 창호는 자신이 없는 와중에도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정진의 머리를 가격하고, 친구들과 함께 몽둥이를 들고 북한 아이들을 쫓아가며 매질한다.

 

북한 아이들이 맞고 쓰러지는 모습은 창호가 그동안 보아왔던 강 위의 비일비재한 죽음의 모습과 닮았다. 체감하고자 언 두만강 위에 누워있었던 창호의 몸은 이제 그들과 대항하는 지점에 선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창호가 북한 아이들에게 반감을 품게 되는 것과 달리 순희는 어떤 심경의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창호는 순희 대신 응징을 가하고 다니지만 막상 순희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북한 아이 정진에게 밥을 차려주고 여동생을 걱정해 줄 뿐이다.


정진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때렸던 창호에 대해 개의치 않는 듯, 약속했지만 구할 수 없었던 북한 우표 대신 미사일 모양의 장난감을 건네준다. 정진의 머리를 한 대 가격한 뒤 정진이 미사일을 두고 갔다는 순희의 말을 듣게 되자 창호의 표정은 미묘하다. 창호는 이 사건으로 인해 탈북 남성이 누나 순희를 겁탈했다는 사실과 또 다른 탈북 아이 정진을 구분해서 보게 된다. 창호는 예정대로 아랫마을과의 축구 시합에 정진을 부른다. 하지만 상점 집 아들 철부는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정진을 공안에 신고한다.

 

 

AKR20110304121600005_01_i_P4.jpg

 

 

축구 시합을 하던 아이들 사이로 공안이 다가온다. 정진이 잡히자 창호는 건물 위로 올라가 정진을 놓아주라며 공안을 협박한다. 공안의 내려오라는 말에 창호는 정말 내려올 듯 프레임을 잠시 벗어나지만 이내 전력을 다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폐교에서 뛰어내리는 데 작용한 창호의 마음은 무엇일까. 표면상으로 창호는 자신의 죽음으로 정진을 살리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진이 공안에 잡히는 것과 상응하는 자신의 행동의 값을 매겨 정진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곧 닥칠지 모르는 정진의 죽음을 흉내 내는 것이 이번에는 충분하지 않다면 창호는 폐교 위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선택한다.


우리의 몸짓들은 우리가 처한 사회적, 지리적 환경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체화되는 것이다. 일이 없어 매일 상점 앞 담벼락에 서서 술을 마시던 남성 두 명이 어느 날 앉아서 마시게 되니 어색하다고 말하는 장면처럼, 정진과 같은 북한 아이들이 숨죽이고 달려서 안전하게 통과해야 하는 강이라는 곳이 창호에게 할아버지와 오붓하게 앉아 얼음낚시를 즐기는 곳인 것처럼, 누군가는 같이 강을 건넌 친구가 죽더라도 숨이 없는 것에 놀라지 않고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몸짓들은 가장 본질적으로 나와 나의 환경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 된다. 역사적, 지리적, 사회적 맥락이 나의 몸을 매개로 하여 나타나고 이 몸짓은 다시 나를 규정한다. <두만강> 속 인물들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는 척하는 것과 죽음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머무르는 것으로, 굶는 것과 먹는 것으로 몸짓의 형태가 달라진다. 영화는 그 차이를 메꾸고자 하는 어린 창호의 극단적인 행동을 통해 지리적으로 분리된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김소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