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클래식에서 인생을 보다 - 피아니스트 전세윤 리사이틀

글 입력 2021.04.1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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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나는 클래식에서 관해서 무지하다. 일상에서 클래식을 몇 번 듣기는 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틀어 놓고 잠에 들곤 하고, 상담을 갈 때 늘 로비에서 반복적으로 틀어주던 슈베르트의 ‘송어’ 정도는 들으면 ‘아! 그 곡이구나.’ 하고 알아차릴 정도다. 그 외에 유명 광고에 사용되는 몇몇 멜로디들은 익숙하지만 제목과 작곡가를 묻는다면 대답하진 못한다. 그 외에 음악사, 클래식 음악에 관련된 지식이 거의 없다. 아마 이 정도가 보통의 클래식에 조예가 없는 일반인의 수준이 아닐까(혹은 그 이하).


외국어로 적혀 있는 제목, 작품번호, 알 수 없는 악장 개념은 나를 주눅 들게 한다. 그리고 몇몇 귀에 익은 작곡가들의 이름 외에는, 나는 클래식의 문법을 모르기에 내가 뭘 모르는지조차 모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는, 내가 지금까지 올린 몇 안 되는 글 중에 글을 쓰기 전부터 가장 걱정이 됐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의 귀로 듣고 보는 클래식은 잘 아는 사람의 시각과는 다를 수 있고, 색다른 감상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가볍게 생각을 하고 관람을 했다.


말했다시피, 나는 클래식의 문외한이기에, 곡에 대한 심층적 분석보다는 감상한 공연의 전체상 묘사와 나의 느낌, 위주로 기술할 생각이다.

 

 


 

 

Program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 6 in F Major Op. 10-2
 
Claude Debussy
Preludes Book 1
Ⅳ. Les sons et les parfumes tournent dans l'air du soir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Ⅵ. Des pas sur la neige
눈 위의 발자국
Ⅷ. La fille aux cheveux de lin
아마빛 머리의 처녀
 
Henri Dutilleux
Choral et Variations Op. 1
 
Johannes Brahms
Piano Sonata No. 3 in f minor O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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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러 가는 날은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예술의전당 IBK홀에 위치한 공연은 집에서 멀지 않기에 나는 여유를 부리며 나갔으나, 비 덕분에 버스가 몹시 막혀서 2시 공연에서 5분 정도 늦게 건물에 도착했다. 헐떡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는데, 공연이 펼쳐지는 공연장의 문 앞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고, 문 옆의 모니터에서 전세윤일 남자가 건반을 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공연이 이미 시작된 줄 알고 다음 인터미션(중간 휴식)까지 기다려야 되나 생각했으나, 아직 내 가 볼 공연이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티켓을 발권받고 자리를 안내받았는데 나의 자리는 앞에서 세 번째 줄이었다. 그 앞에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고, 공연자의 표정 하나하나 포착할 수 있는 무대에서 아주 가까운 자리였다. 아무래도, 커다란 스크린 전체를 조망해야 하는 뒤쪽이 명당인 영화 극장의 자리와는 다르게, 같은 공간에서 연주자의 숨결, 감정을 함께 느껴야 하는, (특히나 독주회는) 앞줄에서 자세히 관찰하며 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자리 선정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약간은 부담스러운 위치였다. 관람자가 집중을 하지 않으면 연주자에게도 영향이 크게 갈 것 같은 오지랖이 들어서 긴장을 하고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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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대기실에서 전세윤 피아니스트가 등장하고 그는 무대 앞에서 짧게 인사를 했다. 우중충한 날씨와 대비되게 젊음의 생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는 의자 끝에 걸쳐 앉았다. 손을 아주 가볍게 들어 단숨에 연주를 시작했다.

 

*


첫 곡은 베토벤의 6번 소나타였다. 경쾌하고 가벼운 선율로 시작되는 곡은 시작을 열기에 알맞았다. 마치 고요하던 숲 속에서 날랜 사슴이 갑자기 뒷발차기를 하는 듯, 그는 건반을 빠르게 쳐 내려갔다. 곧이어 고양이를 쓰다듬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변화들은 초반의 몰입도를 올려줬고, 무거워지다 가벼워지는 음조들에서 베토벤의 화려한 생과 허무한 말년, 죽음 같은, 삶의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이 작품이 내포한 풍부한 유머의 유래에는 작곡자가 가르침을 받든 프란츠 요셉 하이든의 존재가 지적되지만, 스승의 영향에 덧붙여 만전 하게 발휘된 베토벤 자신의 개성도 이 피아노 소나타에 나타나 있다.
 


드뷔시의 전주곡은 낭만적 환상과 꿈을 꾸는 느낌을 준다. 달콤하면서도 어딘가 서글프다. 베토벤이 힘찬 하루의 시작을 위해서 듣는다면, 드뷔시는 저녁이 들어서는 무렵, 황혼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차를 마실 때 듣고 싶은 곡이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그 때문일까, 드뷔시의 곡들은 공부하면서 클래식을 듣는 이들에게 많이 선호된다. 드라마틱하진 않지만, 잔잔함 속에서 안개처럼 넚게 퍼져있는 애수가 가슴을 울린다. 어딘가에서 연하게 들리는 듯한 건물 밖의 빗소리와 눅눅한 공기 그리고 드뷔시의 선율은 정말 완벽한 합주를 만들어냈다.


그는 제목을 문학적으로 썼다. ‘아마빛 머리의 처녀’, ‘소리와 향기가 저녁 대기 속에 감돈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대기, 향기, 어떤 처녀의 뒷모습. 그는 음악을 위한 음악이 아닌, 인생을 위한 음악을 한 것이다. 사건이 만들어내는 격정적인 감정이 아닌, 그 이후의 여운을 음미하고 생각하며 작곡을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프랑스의 작곡가. 라벨, 루셀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전통이나 유파에 구애되지 않고 독자적 음악어법을 확립했다.
 


이어지는 곡은 앙리 뒤티외는 코럴 변주곡이다. 시작부터 강렬한 이 곡은 연주자의 숙련도와 기량을 시험대에 놓기에 적절한 곡이었다. Choral et Variations 코럴 베리에이션스, 단어 그대로 풀이하자면 교회의 찬송가를 변주한 곡이라는 것인데, (아닐 수도 있다) 뭔가 엄숙하고 무거운 과거 교회의 풍경과 화려한 음이 매치가 잘 되지 않는다.


전세윤 피아니스트는 감정을 매우 풍부하게 표현하는데, 특히 감정의 진폭이 컸던 코럴 변주곡에서 그것이 두드러졌던 것 같다. 환희에 찬 표정, 거의 본능적으로 발을 움칠대며 밟는 페달. 그는 슬픔, 기쁨, 슬픔을 종횡무진하면서 고난도의 곡을 적당한 기교를 부리며 잘 풀어냈다.

 

다음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소나타였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남녀의 삼각관계가 그려진다. 로제와의 관계에서 권태감을 느끼는 여자 주인공 폴, 젊고 매력적이며 저돌적으로 자신의 애정을 폴에게 드러내는 시몽, 그리고 원숙미를 갖고 있는 로제. 이 책은 사랑에 과한 복잡 미묘한 감정선의 묘사가 탁월한 소설이다. 스무 살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이런 사랑의 복잡성을 포착해 정확하게 그려낸 것은 그녀의 천재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실제로 브람스 또한 그의 음악적 스승인 슈만의 아내 클라라와 사랑을 나눴다는 점에서 이 삼각관계가 매치가 된다.


브람의 모토이다 ‘자유롭지만 고독하게(Frei Aber Einsam)’

 

브람스의 소나타를 들으며, 그리고 프랑수아즈 사강의 생애를 생각하며, 그들은 진정으로 자유롭지만 고독한 인생을 정직하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냈고, 그것을 길이남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생각을 했다.

 

말년에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나는 나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한 사강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자유를 자기 자신을 소진, 파멸시키며 태워버렸다. 마약과 도박 중독에 빠지며 결과적으론 자신이 선택한 자유를 감당했지만, 그러한 일들의 이면에는 이른 나이의 성공과 그녀의 상황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는 실존적 고독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브람스의 자유와 고독은 좀 더 수동적이고 안전한 방식이다. 그는 스승의 아내를 시몽처럼 온 마음을 다해 열렬히 사모했으나, 그것은 정신적 사랑으로 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브람스에게 그것은 파괴적인 것이 아닌, 사회가 용인하는 어떤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고독을 짊어지며 생을 끝냈다.


이런 배경들을 읽고 연주를 들으니 더 다채롭게 들을 수 있었다.

                                                              

*

 

클래식은 아무래도 클래식에 관한 기본지식이 있어야 찾아서 즐길 수가 있기에, 일반 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접할 기회가 있을 때 시도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결국 모든 예술은 우리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예술들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어떤 예술에서도 우리와 밀접한 이야기를 찾아 낼 수 있다. 자신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연결되며 클래식의 세계로 입문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밖으로 나가 문화생활을 하기 힘든 이런 시국에서 클래식 공연은 정말 치유되는 경험이었다. 대중들에게 이런 공연의 향유가 더욱 활발하길 바란다.

 

 

[박정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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