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소설을 읽는 듯한 영화, 김종관 감독의 [아무도 없는 곳]

지루한 건 싫지만, 일렁이는 빛과 어둠처럼 잔잔한 것은 보고 싶을 때
글 입력 2021.04.02 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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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끈기없고 쭈뼛거리는 성격 탓에 ‘팬질’을 잘 못하는 내가 감독님의 강연도 듣고, 그의 단편 상영전을 본적도 있으며, 이번에는 신작 상영회를 다녀왔다.

 

나는 평소 노래를 들을 때도 목을 강하게 쓰며 내지르는 것보다 일기를 적어 내려가듯 잔잔한 느낌을 선호한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그런 노래와 비슷하다. 간혹 나오는 역동적 장면의 순간에도, 한 차례 회상을 거쳐 나온 것처럼 찰랑이는 빛이 흐른다.


즉 내달리고, 이 악물고 악을 쓰고, 유쾌·상쾌·통쾌한 식의 매운맛, 마라맛, 얼얼한 맛이 판을 치는 대중문화 속에서 ‘지루한 건 싫지만 잔잔한 건 보고 싶어’란 마음이 간절히 피어오를 때, 손쉽게 찾을만한 것이 김종관 감독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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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개봉한 [아무도 없는 곳]도 그랬다. 분명 영화를 보고 있는데,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훅 풍겨오는 활자 잉크 냄새, 띄어쓰기들이 총총 만들어낸 여백의 기운이 영화에서 읽혔다. 주인공의 직업이 소설가였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곳]은, 몇 년 만에 서울을 들른 소설가가 각각 네 명의 인물을 만나는 이야기다.

 

일회적 만남, 오랜만의 만남, 갑작스러운 만남이 서울 골목과 조용한 공간을 오가며 대화를 나눈다. 그뿐이다. 누군가가 나타나 문제를 멀끔히 해결해주는 것도, 삶이 한순간 송두리째 뒤엎어지는 것도, 평생을 핑크빛으로 물들일만한 사랑을 찾게 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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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화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연속적으로 살아나가는 것과 같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어쩌면 현실 속 우리도 어떤 ‘영화적 순간’이 아닌 평범한 일상을 통해, 조금 더 비범했던 잠깐의 교류를 통해 오히려 ‘영화적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 속 주인공이 내가 된 것 같다. 감독도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면이 변화하는 얘기를 만들자는 취지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옆에 없지만, 너무나 사소해서 지나갔고 잊고 있던 내 서울에서의 대화의 기억들이, 그리고 그 공기의 분위기가 갑자기 면밀히 떠오르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고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등장하는 정보가 한정적이었다는 진행자의 말을 들으면서, 소설 창작 수업에서 배운 헤밍웨이의 빙산이론이 떠올랐다.

 

 

빙산 이론 (Iceberg Theory)은 미국 단편소설에서 나타나는 경향인 미니멀리즘 수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제시한 이론이다.


"만약 한 신문 작가가 자기가 무슨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다면,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생략할 수 있으며, 작가가 충분히 진실되게 글을 쓰고 있다면 독자들은 마치 작가가 그것들을 진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빙산 이동의 위엄은 오직 팔 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 - 헤밍웨이

 


그래서일까, 많은 정보가 드러나지 않은 소설의 페이지를 넘길 때는 천천히 궁리해나가며 읽어나갈 수 있는 반면, 소설 같은 영화는 순간순간 따라가기 어렵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건이 시원하게 진행되는 것이 상업영화의 덕목으로 여겨지는 현시대 속, 다른 결의 영화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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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를 보면, 카페 사장이 되어 짐짓 모르는 척 앉아 있다가 사연 있는 손님들의 이야기가 스르르 귓속으로 들어앉아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기분, 모르는 사람이 놓고 간 일기를 어쩌다가 한 장 한 장 손으로 짚어가며 안경까지 고쳐 쓰고 읽어 내려가게 된 기분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도 없는 곳]이 새벽빛으로 물드는 시각, 서울역을 향해 가는 시내버스 창밖으로, 몇 년이 지나도 가슴에 남아있는 어떤 티끌 같은 대화를 곱씹어보는 차분함의 경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진한 대화를 각각 네 명과 네 번 정도 하고 싶어졌다.

 

 

[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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