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일의 태양이 뜰 때 오늘의 태양은 진다 - 아무도 없는 곳

글 입력 2021.04.0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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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심장이 빨리 뛰는 일이 잦아졌다. 보통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카페인을 많이 마셨거나 불안하거나. 어느 이유든 별로 유쾌한 감각은 아니다. 주로 긍정적인 상황이 아닐 때 벌어지는 일이며 그런 심장 박동은 몸이 떨리는 현상까지 동반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을 봤을 때도 그랬다. 영화가 시작되자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인을 찾기 위해 그날 하루를 돌이켜봤다. 커피도 마셨고 스트레스도 받았던 하루라 뚜렷한 원인을 진단할 수 없었다. 게다가 손까지 떨리기 시작했다. 고요한 영화와 달리 시끄러운 신체가 집중을 방해하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어떻게든 진정해보고자 엄지손가락을 꽉 잡았다. 진정되기는커녕 맥박만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니 불쾌한 심장박동이 영화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뜀으로써 증명되는 나의 삶이 영화의 가장 주요 소재인 죽음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평소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생각을 다시 꺼내보았다. 나도 언젠가 늙을 것이고 결국은 죽을 것이다. 이 자명한 사실은 오히려 지금 내가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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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김종관 감독의 <아무도 없는 곳>은 창석이라는 소설가가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각 챕터의 소제목이기도 한 미영, 유진, 성하, 주은을 차례대로 만나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단순한 플롯으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내는 죽음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죽음을 거대한 비극이나 환상적인 사후세계로 가는 관문 같은 것이 아닌, 산 자들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일 뿐이다. 생의 한 가운데서 죽음과 만난 그들은 아파하거나, 부정하거나, 이겨내려 하거나, 기억하는 등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나에게 죽음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승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만큼은 평등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거나 부를 축적한 이라도 죽음을 거스를 수 없고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이 점은 영화에서도 똑같았다.

 

창석이 만난 사람들은 창석을 포함해서 모두 죽음을 이겨내지도,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들이 알 수 있는 진실은 딱 한 가지다. 모든 생명은 언젠가 죽으며 자신도 예외는 아니라는 점. 그렇게 그들은 단 하나의 진실만을 품에 안고 죽음의 흔적이 묻은 삶을 힘겹게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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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은 죽음이 주요 소재라는 점에서 김종관 감독의 전작 <밤을 걷다>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 이지은이 누군가와 마지막 밤을 보내면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내용의 짧은 영화다. <밤을 걷다>의 밤은 영원하지 않다. 아침이 밝으면 밤도, 밤을 걸으며 나눴던 대화도 사라진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후반부 창석이 걷는 새벽녘의 거리가 곧 <밤을 걷다>의 사라진 밤 이후 산 자들에게 남겨진 숙제처럼 느껴졌다.

 

보통 새벽은 새 출발을 나타내지만, <밤을 걷다>와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새벽이 표현하는 건 새로 시작한 오늘이 아니라 저물어버린 어제다. 스칼렛 오하라가 힘주어 외쳤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내일의 태양이 뜨려면 오늘의 태양이 져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밤을 걷다>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삶에 저항한다’고 말했던 이지은은 <아무도 없는 곳>에선 시간을 잃은 여자 ‘미영’으로 등장해 전작에서 한 말을 반박한다. 산다는 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삶에 충실한 태도도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시간을 잃어버렸던 미영은 받아들인 뒤에야 비로소 시간을 되찾는다.

 

 

 

대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음’만큼 중요한 소재는 ‘대화’이다. 창석은 7년 만에 온 서울에서 미영, 유진, 성하, 주은을 차례대로 만나며 대화를 나누는데 창석은 처음과 끝에는 화자로, 두 번째와 세 번째에서는 청자로서 대화에 참여한다.

 

미영과의 대화에서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냈던 창석은 주은과의 대화에선 실제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펼치고, 유진에게서 생명을 포기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성하에게선 죽음 앞에 발악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화를 나눈다’는 일상적인 행위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에 나온 모든 인물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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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죽은 자를 기록한 영상이나 사진을 볼 순 있어도 말을 걸 수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에 우리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는 전하지 못한 진심과 들어주지 못한 말들이 사무치기 때문이다. 소통은 산 자들의 특권이다.

 

그렇다면 나는 소통이라는 특권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들어야 하는 말을 들으면서 살고 있는가. 어쩌면 내가 죽지 않았으면서도 살아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건 세상과의 소통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 아닐까.

 

좋은 영화는 극장 밖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 말에 따르면 <아무도 없는 곳>은 내게 좋은 영화다. 영화관을 나오고 현실과 마주하자마자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집으로 가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나는 왜 의미에 집착하는가?’였다.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이 ‘그냥’ 산다. 오늘 하루가 그저 그래도, 내일도 반복될 것을 알아도,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탐색하지 않아도 그냥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수많은 이유를 붙여가면서 산다. 밝은 햇살, 정성 들인 한 끼, 휴일의 산책 등등 일상적인 순간에서 최대한 열심히 행복을 찾아낸다.

 

남들은 이런 내가 긍정적이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라고 해서 부정적인 사람인 건 아니다.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절망에 빠졌을 때 왜 사느냐는 물음에 ‘그냥’, ‘태어났으니까’, ‘죽기는 싫으니까’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내가 의미에 집착하는 건 의미를 못 느끼면 쉽게 절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탐색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순전히 살고 싶다는 본능 때문이다. 수시로 떠오르는 생각을 그냥 흘러 넘기지 못하고 굳이 글로 기록하는 것도 사라지기 싫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중반부를 넘어서자 심장에 손을 갖다 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고요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고요가 반갑지 않고 씁쓸했다. 사실 나는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마냥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엄지손가락을 쥔 것에는 맥박이 제대로 진행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시종일관 ‘죽음’에 대해 말하는 영화를 보며 나는 내가 죽음에 초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기 전, 평소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내가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잦아드는 심장 박동에 아쉬움이 밀려오던 그 순간, 뒤늦게나마 아주 당연한 사실을 인정했다. 나도 살고 싶은 거다. 죽음을 맞거나, 목도하거나, 경험할 뻔 했던 영화 속 모든 인물처럼.

 

<아무도 없는 곳>을 보고 몇 번의 아침을 맞이하고 몇 번의 밤을 떠나보냈다. 시작과 끝, 삶과 죽음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시작하고, 죽기 위해 살고 있다.

 

이렇게 끝과 죽음이 수시로 몰려오는 삶 속에서 살아있다고 확신하기 위해 의미에 집착하던 나는 영화로부터  새로운 가르침을 얻었다. 살아있으려면  열심히 대화해야 한다.

 

말을 걸고 말을 듣는 것. 삶이 내린 당연하고도 어려운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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