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예술가에게 필연적인 소통 - 아무도 없는 곳

글 입력 2021.04.01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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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누군가와 있어도 내가 나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선호한다. 표면적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 있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나 내면적으로 아무도 없는 곳에 있다고 느끼든 그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내 주관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그 순간 속에 겪는 혼돈이 두렵다. 그 생경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고, 그가 변화시킬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도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주도적으로 변화를 꾀하는 사람들을 볼 때 자연히 피어나는 동경은 그 변화가 멋들어져서라기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파악하고 변화할 필요를 인지했다는 그 마음가짐에 더 대단함을 느끼게 된 것 같다. 이 영화가 더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런 마음에서 오는 것으로 추측해본다. 아무도 없는 곳. 곧 자유의지로 나를 둘 수도, 나를 꽉 붙잡을 수도 있는 이 곳에서 후자를 선택한 창석의 심리 변화를 유의 깊게 보는 이유가 앞서 언급한 동경의 연장이라고 보면 설명이 쉬울 듯 하다.

 

나도 변화하고 수없이 변해본 사람으로써 '변화'라는 단어에 감히 말하자면, 혼자만이 이뤄내는 변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변화는 무엇에 귀감을 받아 이루어지지 않았었나. 그 주체는 언제나 사람이었고, 우리는 늘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 지향할 것과 지양할 것을 구분 지으며 둥그렇게든, 각지게든 어떤 모습으로든 변화해왔던 걸 기억할 수 있다. 하물며 그 계기가 아주 사소한 것이더라도 어떻게 내 마음을 치고 들어왔냐는 것에 더 중점을 두며 말이다.

 

영화 속 창석은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대화를 거쳐 진귀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라는 캐릭터로 자리 잡아 줄곧 그 가치관을 유지하던 창석이 4인과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결국은 새로운 창작의 방식을 도입하며 마무리되는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어딘가 오묘하고 기이하며 명확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기 보다 꿈속의 흐릿한 이야기를 전달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흐릿한 눈으로 창석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 미영이 실은 창석의 어머니였던 것, 창석을 귀인으로 여겨 반가워하던 성하가 갑작스레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는 등의 일상 속 비일상적인 틈이 4인과의 대화를 통해 짙게 드러나 꿈과 현실의 관계를 모호하게 설정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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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석이 만난 4인의 인물들은 각각 남편을 잃고 살아가는 창석의 어머니 미영, 아내를 잃은 사진가 성하, 외국인 남자친구의 애를 지우고 그를 떠나보냈던 편집자 유진, 사고로 죽을 뻔했던 경험이 있는 바텐더 주은으로, 영화는 창석과 네 인물과의 개별적인 대화를 옴니버스식으로 연출해 각각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느껴지나 중간 중간 비춰지는 창석의 변화로 인해 상쇄된다. 따라서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말문을 트지 않으면 서로 전혀 알 수 없는 바쁜 현대 사회에 몸 담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오로지 대화로 이끌어낸 감정 변화만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창석이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마주하는 서울 사람들은 늘 어딘가로 바삐 걸어가고, 수화로 이야기하고, 친구들과 바에서 즐거운 시간을 맞기도 한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지만 접점이 없어 우리는 그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하고, 대화할 길이 없으니 풀어내지 못한 마음은 방황하기에 십상이다.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는 사회를 버석하게 만들고, 그 경계를 없앨 용기는 점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곳>은 타인과 나, 둘만 남겨진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대화하기를 노력한 자에게 보상이라도 주듯 상상해본 적 없던 용기를 쥐여준다. 현상을 보고 감히 상상해볼 수 있는 용기, 그것을 글로 쓸 수 있는 용기, 전처에게 전화할 수 있는 용기. 전처에게서 돌아오는 긍정의 대답은 대화를 통해 겪는 내면의 변화가 어떻게 희망과 맞닿을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 의도는 아닐까 싶다.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전자기기에 눈을 맞추는 것이 익숙한 오늘날에, 이 버석한 사회의 분위기를 깨보면 좋은 기운이 감돌 것이라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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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 보면 비현실적인 일의 연속에 계속 의문을 품게 된다. 감상하는 내내 '저런 식으로도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고? 요즘 같은 세상에서?'라는 비판을 삼았으나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일상과 비일상이라는 두 키워드의 어긋남에서 오는 모순이 오히려 이 영화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그 어긋남들이 계속해서 서로를 전복시키다 제일 현실적인 방식으로 창석을 변화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험을 통해 개인의 창작 관념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소통'의 이점,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이야기로 이루어진 소설을 쓰는 창석이니만큼 타인과의 소통만큼 그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게 또 있나 싶다. 어떤 관점으로 창작을 대해야 할지,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에 대한 거듭되는 고민, 이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예술가가 택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소통' 이라고 말했던 영화였다.

 

 

[이보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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