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이지 않아도 살아가는 이들 - 보이지 않는 것들

파도처럼 밀려드는 인생 이야기
글 입력 2021.03.2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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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의 시대다.

 

영화, 드라마, 심지어 식문화까지 모든 것이 다 자극적이다. 더 맵고 단 것, 혀를, 뇌를 만족시켜주는 짧고 강렬한 것을 원하는 세대가 되었다. 기존에 빠르던 것은 느린 것이 되었고 기존의 낭만은 지루해진 세상이다. 책 한 권을 읽기보다 요약본을 찾아 읽는 걸 선호하는 짧고 굵은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표현하는 삶은 인생의 절망이나 극적인 부분만 모여있고 진도가 빨리도 나가는데 인생은 24시간 일주일 365일 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나간다. 지루하다. 세상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여주니까 그만큼 열광할 수가 없다. 현실 도피의 일종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이런 자극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각 캡처는 담백하고 짧아서 읽기 수월하지만 안에 들어간 내용은 자극적이지 않다. 자극적일 수 있는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거나 생략해버린다.

 

소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삶. 한평생 바다에서 살아온 섬사람의 일상. 인생이니만큼 안 좋은 일도 있고 불안과 다툼도 있으며 가끔은 기쁜 일도 존재한다. 이미 끝없이 펼쳐진 일상에 지친 사람들은 길고 느릿한 전개가 고문처럼 느껴진다. 삶을 도피하기 위해 찾은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찾아내다니. 진도가 나갈 수가 없다. 우연히 로또에 당첨되지도 않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부각하거나 선한 면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마법은 당연히 없고 로맨틱한 사랑을 연출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자극적인 것만 먹으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자극적인 것은 쉽게 몸을 망치고, 필요한 것을 잊게 만드는 데다가, 강렬한 만큼 금방 질리는 탓이다. 그에 비해 느리고 잔잔한 이 책은 들여다보면 들여다 볼수록 매력적이다. 모든 인생이 똑같지는 않기 때문에, 책에 그려진 외국 섬사람의 삶은 도시 사람에게 무척이나 생소하다. 내가 겪지 못한 인생이 섬세한 필체로 적혀있다. 갈수록 몰입하게 된다. 잔잔한 파도 소리, 짭조롬한 소금 내, 뜨거운 햇살에 일하는 섬사람들의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들어와 청각, 후각까지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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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묘사가 섬세하지 않은 것도 재미를 준다.

 

사람은 결코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제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하거나 추측한다. 이 책도 그렇다. 인물의 표정과 행동을 주로 묘사하기 때문에 책 속의 등장인물일 뿐이지만 심리를 완벽하게 알 수 없다. 현실에서처럼 나름의 방식으로 판단하거나 추측할 뿐이다. 나의 추측이 정답일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꼭 내가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되어서 상황을 바라보는 듯하다.

 

간접 체험하는 삶은 느리고 담백하지만 꾸준히 흐른다. 한 세대가 저물고 다른 세대로 넘어간다. 세대교체는 자연스러우나 갑작스럽다. 적응할 시간도 없이 이루어지는데도 어떻게든 살아나간다. 본래 인생이란 연습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어른이 된다. 삶을 책임져야 하고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가족끼리도 싸움이 일어나고, 때론 도피할 때도 있으며 선한 행동이 반드시 모두의 박수를 받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멈추지 않는다. '내'가 죽기 전까지 죽음은 장례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시냇물처럼 끊임없이 흐른다. 손이 희고 포동포동하던 잉그리드는 어느새 한 섬의 주인이 되고 한스가 만든 아기 의자를 쓰던 라스는 한스가 없어진 후를 걱정하는 어른이 된다. 살다 보면 영원히 나이가 들지 않을 것만 같은데. 적어도 책에서는 그럴 수 있을 텐데 거부하니 더욱 남의 삶을 엿보듯 같이 사는 듯하다. 그러는 동안 독자는 등장인물을 이해하고, 정을 느낀다. 마지막 장에 책을 덮는다. 끝맺은 기분이 아니다. 멈추지 않고 펠릭스와 마리아의 아이들 이야기까지 계속 흘러갈 것만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우리는 폭풍 전의 고요를 이야기하며 침묵이 경고 혹은 행동을 취하라는 신호라고 말하거나 한참 동안 성경을 뒤져 그 중요성을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섬의 침묵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도 그 침묵에 대해 말하지 않고 강한 인상을 받아도 그 침묵을 기억하거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침묵이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아주 잠시 죽음을 본 것에 불과했다.

 


모두가 이야기한다. 삶은 경험이 중요하다고. 코로나 시대에 경험이란 정말 값진 것이 되었다. 핸드폰이나 컴퓨터, 비행기나 차가 없을 때도 경험은 언제나 중요했고, 그들은 직접 움직이진 못하더라도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을 정의 내리거나 깨달음을 얻었다. 공감하기도 하고 위로를 느끼기도 한다. 인생과 가장 흡사한 이 책 역시 그렇다. 죽음이나 불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담담한 문체와 어우러진다.

 

모든 세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은 일만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생각은 분명 목적지가 있고 최악의 경우 같은 자리를 빙빙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 되돌아온다. 이런 문장이 그렇다. 자라는 것이 끝나면 인간은 하염없이 정체되거나 퇴색한다. 과거의 일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현재가 된 미래의 지식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생이 지옥 같다는 것을 배웠기에 웃지 않는 대신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잉그리드의 행복한 어린 시절 기억과 똑같을 수 없는 건 세상엔 불안이라는 불길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잉크리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각은 그녀가 성장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잉그리드는 가을부터 다른 섬에서 온 아이들과 함께 하브스테인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두려워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갖지 않은 걸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섬이 너무 많았다. 

 

 

온전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작은 세계는 나이가 들면서 깨진다. 부모님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며 내가 우물 안에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알을 깨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갈 시간이다.

 

 

사람들이 갑자기 야생에서 새로운 길을 찾고, 직접 걸어 보니 괜찮아서 길이 되는 것처럼 습관이라는 말로 표현하듯 일어나 버린 일이었다.

 

섬사람은 섬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안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이 지루한 섬을 벗어나려고 애쓴다. 하지만 섬사람들은 모두 어떻게든 떠나지 못하게 붙잡느라 혈안이다. 결국 그들은 제자리로 돌아온다.

 

 

인생은 유동적이기 때문에 매 순간 새롭다. 새로운 것은 불안하다. 기존의 세계는 습관의 울타리 안에 놓여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길이었겠지만 어느 순간 익숙한 것이 되어버려 다른 길을 막는다. 어른이 될수록 아집이 늘어나고 과거를 미화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고 그래서 삶이 천국보다 지옥과 닮아있다.

 

잉그리드에게도 그렇다. 바브로가 집을 떠나거나 이방인이 섬에 쳐들어왔을 때의 불안은 긴 시간 그를 괴롭힌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선 적응하지 못하고 몰래 밖으로 나가 하염없이 섬을 보며 그리워한다.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배를 타고 나갔다가 죽을 뻔하거나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기뻐하는 듯한 어머니의 행동에 실망하기도 한다. 지루한 섬을 벗어나려고 애쓰다 겨우 하인 일을 맡게 되었을 땐 예기치 못한 일에 휘말린다.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고 외면한다.


 

잉그리드는 부딪히는 파도를 위험이나 위협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의 수단이자 해결책으로 보는 바다의 딸이었다.

 


잉그리드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울함에 잠겨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있지도 않고 벌어진 일을 비관하지도 않는다. 강한 바다와 추운 혹한기에 맞서 몇 년을 살면서 거대한 고통 앞에서 해결책을 찾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한스, 고모 바브로는 그에게 생활의 지혜를 나누어 주었다. 거위를 빗는 법부터 어망을 땋거나 물고기를 잡는 등 살기 위한 지식뿐 아니라 거센 파도에 정신이 혼란하고 울적하더라도 굳건히 서 있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이 섬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다. 특출난 사람도 없다. 비브리는 미혼모이고 마틴은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만큼 늙고 초라해졌다. 한스는 모두를 섬에 붙들어 두려고 하고 잉그리드는 감수성이 뛰어나지만 다소 거친 편이다. 완벽한 사람도 특출난 사람도 없으니 평범함이나 정상이라는 테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을 더듬는 친구가 찾아와도 누구도 놀리지 않고 어린아이의 의견이라고 마냥 무시하지도 않는다. 조금만 달라고 이상하게 보고 구분을 두려는 현대에 정말 필요한 게 무엇인지 넌지시 알려준다.

 

바다는 언뜻 보면 잠잠하고 끝을 알 수 없이 고요한데 가까이에서 살펴보면 끊임없이 일렁인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분다. <보이지 않는 것들>도 똑같다. 대충 보면 지루하기 그지없는 한 섬마을 이야기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매 순간 사건이 가득하고 사건을 견디거나 흘려보내거나 이겨내는 경험담으로 꽉 차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지만 없는 것이 아니기에 중요하다.

 

어디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있다. 클립만 모아볼 수도 없고 스킵도 없는 진부한 삶이다. 이미 살아가고 있는 삶을 책으로도 접하다니. 지긋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는 삶이라서 오랫동안 바뢰이 섬 사람들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깊은 풍미는 자극적인 맛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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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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