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잉그리드,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 보이지 않는 것들

잉그리드에게 어깨를 내어 주고 싶었다
글 입력 2021.03.25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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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jpg

 

 

남들이 얼핏 봐서는 무인도로 보일 수 있지만, 잘 들여다보면 집 한 채와 해변을 따라 걷는 한 가족이 보이는 섬. 바로 바뢰이 섬이다.

 

그 가족의 성은 바뢰이. 바뢰이 가족의, 바뢰이 가족을 위한, 바뢰이 가족에 의한 섬이다. 가장 역할을 하는 한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 딸 잉그리드, 여동생 바브로, 마지막으로 전대 가장인 아버지 마틴까지. 바뢰이 가족은 가끔 본토에 나가 섬의 산물들을 내다 팔고, 우유 수송선을 타고 학교에 다니며 치열하고도 잔잔하게 살아간다.

 

 

"폭풍은 널 해치지 못해."

한스가 딸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하지만 잉그리드는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들리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들 p.60



열두 살에 잉그리드만큼 

많은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잉그리드는 부딪히는 파도를 

위험이나 위협으로 보지 않고 

모든 것의 수단이자 해결책으로 보는 

바다의 딸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 p.149


 

요동치는 파도와 사납게 다가오는 듯한 하늘. 나 또한 공포에 떤 장면이다. 잉그리드는 겨우 네다섯 살이었다. 잉그리드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생선을 손질했고, 선박용 밧줄도 옮기곤 했다.

 

이후 잉그리드가 성장하여 본토로 유모 일을 하러 갔다가, 부모를 잃게 된 펠릭스와 수잔을 데리고 바뢰이 섬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린다. 펠릭스는 바브로의 아들인 라스의 질문에 모두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잉그리드와 라스는 섬에서의 생존을 위한 모든 일에 어린 시절부터 익숙해졌다. 그에 비해 본토에서 잉그리드의 보살핌 아래 자라 온 펠릭스는 다소 어려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옳은 걸까? 잉그리드가 세상의 많은 12살 아이 중에 가장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한들, 난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잉그리드를 자랑할 수 있을까? 12살 아이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일찍 철든 것은 응원해야 하는 일인가? 그러나 잉그리드가 일찍 철이 든 것은 어쩌면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 그 섬의 관습으로 인정해야 하는 부분일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을 때, 나도 이미 바뢰이 섬 어른들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폭풍우가 치던 날, 한스는 딸에게 절대 좌초하지 않는 바뢰이 섬의 든든함을 가르쳐 주려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잉그리드는 엄마 마리아의 '한 번만 더 미친 생각을 했다가는 이혼한 뒤 여길 떠날 것'이라는 한스를 향한 잔소리를 듣고 '섬을 떠날 수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뢰이 섬에 한 번 정착하면 '섬이 모든 힘을 동원해서 붙잡는 통'에 절대 떠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섬이 정말 그렇게 했을까? 모든 힘을 동원해서 떠나는 이들을 붙잡는 그 '섬'은 사실 섬의 '사람들'이 아닐까?

 


넬리는 바뢰이에서 절대로 

묻지 않는 질문을 했다.

왜 문에 열쇠 구멍이 없어?

라스 아빠는 누구야?

너는 왜 형제자매가 없는 거야?

거기에 대해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셔?

모두 잉그리드가 엄마한테 하면

안 되는 질문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 p.158

 

 

잉그리드가 학교에서 만난 친구 넬리는 바뢰이 섬에 놀러 와서 잉그리드에게 갖가지 질문을 던진다. 나와 잉그리드 모두가 궁금했지만, 궁금해할 수 없었던 질문들. 타인에 의해 알게 되는 나의 결핍은 잔잔했던 바다에 돌을 던진다. 모르는 게 약일지, 아는 게 힘일지는 자신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어쨌든 이 말은 잉그리드가

평생 동안 바다 위 움직이지 않는

바위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은 썩어 가는 뗏목이었고,

자기 아빠가 계속 떠 있게 만들려고

애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 p.257


 

마틴에 이어 한스까지 세상을 떠났다. 유일한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듯했다. 바뢰이 가족들에게 좌절과 절망은 말릴 새도 없이 밀려들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바뢰이가와 본토 간의 소통뿐 아니라 바뢰이가 사람들 사이 소통의 부재를 문제로 지적한다.

 

더 큰 섬을 원했던 한스와 더 작은 섬을 원했던 마리아. 서로 원하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다가 갑작스레 찾아온 한스의 죽음은 바뢰이섬의 고립과도 같았다. 섬을 이끌던 자들의 다소 보잘것없는 죽음은 바뢰이섬에 새바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극이 아니었을까.

 

 

바브로가 어릴 때

바뢰이섬의 여자들은 의자가 없었다.

가족들은 테이블 앞에 

서서 밥을 먹었다.

집안 여자 중 유일하게

어머니인 카야만 의자에 앉았으나

그것도 첫아들을 낳은 뒤였다.

 

보이지 않는 것들 p.131

 

 

마리아까지 아프게 되고 섬을 책임져야 했던 어린 가장 잉그리드. 지난 역사 속에서 바뢰이섬의 여자들은 의자조차 받지 못했지만 잉그리드는 당당하게 섬의 왕으로 성장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270여 장의 페이지 안에서 잉그리드의 긴 성장기를 이야기한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을 독자들이 어색하거나 이질적으로 느끼지 않게 한 것이 작가의 실력을 입증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바뢰이 가족 중 한 명이 되었고, 잉그리드의 성장을 연민했으며, 그녀에게 어깨를 내어 주고 싶어졌다.

 

한창 음악 시장에서도, 에세이 출판시장에서 유행했던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는 말. 내가 바뢰이섬에 갈 수 있었다면, 베스트셀러에 아주 오랫동안 올라 있었던 수많은 에세이 중 한 권이라도 사다가 잉그리드의 작은 손에 쥐여줬을 텐데.

 

 

[이건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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