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흑과 백으로 담아낸 격동의 삶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3.24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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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린 네샷 전시가 한국에서 열린 것도 벌써 7년 전의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네샷 회고전이 한창이던 그 여름에는 책상 앞에 앉아 문제를 푸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자랑스레 지갑에 끼우던 스물을 지나 겁 없이 유럽을 홀로 누비던 스물하나와 스물둘에도 여전히 나는 네샷의 존재를 몰랐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눈과 귀에 익은 이름과 작품을 쫓아다니기 바빴던 시절이었다.

 

나는 스물셋 초봄에서야 비로소 네샷을 만날 수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더 브로드 미술관 특별전이었는데, 운 좋게도 무료 관람일이었다. 전시장 앞에 커다랗게 프린팅된 낯선 배열의 알파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샷? 네샤트? 네스핫? 단순한 여섯 개의 문자가 합쳐지면 어떤 발음일지 궁금해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운이 좋네요. 내일이 네샷의 마지막 전시일이거든요. 궁금증이 빠르게 해소된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정말요? 이렇게 럭키할 수가! 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리고는 네샷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입구로 빨려 들어갔다.

 

네샷이 나를 찾아와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그녀(Neshat)와 수많은 그녀(Women)들은 자기소개를 앞다투어 시작했고 나는 무방비상태로 함락당했다. 이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던 사람은 몇 시간 뒤, 전시장 출구로 나왔을 즈음엔 네샷의 열렬한 팬이 되어있었다.

 

 

 

흑과 백으로 사회를 포착하다



shirin neshat.jpg

 

 

쉬린 네샷은 1957년 이란의 카즈빈에서 태어나, 1979년 이란 혁명 발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영상 및 사진을 통한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네샷의 작품은 대부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젠더, 종교, 그리고 이슬람 문화를 주제로 한다. 직접 경험한 이란 및 이슬람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복수 정체성—여성, 이란인, 이민자, 종교인 등을 탐색한다.

 

네샷은 언제나 두 영역의 경계에 서서 양측을 조망한다. 이슬람과 서구, 고대와 현대, 여성성과 남성성 등 양분화된 주제들 사이를 줄타기하며 서로를 감각적으로 연결한다. 연결은 언제나 대비(對比)의 형태로 나타난다. 네샷이 즐겨 사용하는 흑백기법은 주제의 대비를 극대화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부조리를 해부한다. 특정한 색이 아닌 흑백의 보편성 아래서, 그녀가 담아낸 이야기들은 고국인 이란을 넘어 만국 공통의 언어가 된 채 무수한 유사 상황들을 관통한다.

 

인류 차원의 담화가 된 작품들은 폭력에 희생된 무언가를 추모하는 듯한 슬픔과 이방인의 고독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에 네샷의 작품은 개인적이면서도 언제나 보편적이다.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정치적 논의를 끌고 오기에 앞서 그녀의 시선 속 대상들은 언제나 감상자의 마음을 울리며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네샷의 표현처럼, 그들은 이차원의 세계를 뚫고 나와 우리를 만진다(touch).

 

 

 

대표작 <격동>



 쉬린 네샷, 격동(Turbulent), 2개 스크린 비디오설치, 10분, 1998,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작

 

 

화면은 둘로 나뉘어 있다. 왼쪽 화면에는 남자가 서 있다. 공연장은 관객들로 가득 차 있고 남자는 스탠딩 마이크 앞에서 자유롭게 노래한다. 오른쪽 화면에는 여자가 홀로 서 있다. 왼쪽 화면 속 남자의 노래가 환호 속에 끝나면 여자가 마이크 앞에 서서 소리를 낸다. 어떠한 언어를 발음하는 것이 아닌,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은 마치 감정의 토설처럼 들린다. 후반부로 갈수록 신음은 점차 고조되어 광기 어린 절규에 가까워진다. 여인의 통곡은 텅 빈 공연장 안에서 외로이 공명하며 울려 퍼진다.

 

왼편의 남성 가수는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여성의 무대를 응시하는 것일 수도, 노래만 듣는 것일 수도, 아니면 어떤 접촉도 없이 그저 홀로 멀뚱히 서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모호한 얼굴과 태도를 해석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으로 남는다. 여성의 노래에 흠뻑 매료된 모습인 듯하면서도, 살짝 뒤틀린 눈썹에 집중해보면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한 표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종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거나 여성 가수를 연민하고 있다는 상상도 해본다. 하나의 몸 안에 여러 명이 숨 쉬고 있다고 상정이라도 한 것처럼 지치지 않고 또 다른 반응을 발굴해본다. 단수(單數)의 남성 한 명은 순간 복수(複數)의 거대한 집단이 된다.

 

<격동>은 여성을 대상으로 공공장소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한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관객의 유무를 비롯한 여러 세팅에서 알 수 있듯이 언제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는 남성과 가창의 욕망을 거세당한 여성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남성 가수가 부르는 곡은 전통적인 페르시안 사랑 노래임에 반해 여성 가수는 전통을 뒤엎는 무(無)가사의 노래로 저항정신을 표출한다.

 

흥미로운 것은 남성의 노래는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는 관객만이 이해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의 노래는 오히려 가사가 없기에 보편성을 획득한다는 점이다. 무정형의 노래는 갓난아기의 울음처럼 가슴을 찢고 들어와 내면 어딘가를 난도질한다. 곡조와 가사 모두를 지닌 세계와 모든 것을 박탈당한 세계는 어느새 수직적으로 병치된다.

 

 

[크기변환]turbulent.jpg

 

 

네샷은 관람자를 두 화면을 가른 경계벽 위에 세운다. 그리고 잔혹할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불평등의 세계를 압축하여 제시한다. 우리는 양 화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한쪽을 보려면 다른 쪽을 포기해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취하게 되면서, 네샷의 말처럼 관람자는 ‘편집자’가 된다. 개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눈동자의 랠리(rally)는 극명히 다른 두 조각을 꿰매고 편집한다. 수동적인 관람자에서 벗어난 에디터는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의식과 감정이 동시에 요동친다.

 

비로소 영상 안과 영상 밖은 모두 <격동>한다. 격동하는 역사를 타고 격동하는 감정과 격동하는 관찰자는 잘 짜인 교향곡처럼 어우러진다. 침묵하라는 불의 앞에서 더 크게 소리 내는 여성을 다시 한번 마주한다. 연약함 속에 강인함이 있다. 목적 있는 격동은 불안정이 아니다. 흔들리면서도 견고하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나도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오른쪽 화면처럼, 나는 그저 견고한 격동의 결말이 무한한 생명이기를 기도한다.

 

*

 

침묵이 아닌 격동으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을 떠올린다. 치졸한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꿈틀거리는 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행동과 발화와 불꽃과 피가 보통의 단어인 사람들의 안전을 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열심히 피력하는 목소리들을 더 듣고 싶다. 지치지 않는 움직임에 지치지 않고 응답하고 싶다. 그러니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활짝 귀를 열고 힘껏 눈을 뜨겠다.

 

어떤 에너지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어떤 움직임은 영원히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 두 문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지한다. 선명한 대비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현상에 저항하는 밤들을 축복한다.

 

 

[최미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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