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보이지 않는 것들은 아무도 모른다 - 보이지 않는 것들

글 입력 2021.03.24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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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에 들어가려는데, 공동 현관문 앞에 붙은 통지서를 발견했다. 000호에서 요금이 체납되었으니 전기를 끊을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000호가 내가 사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와 함께 내가 매달 늦지 않게 요금을 납부할 수 있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통지서가 공개적으로 붙여지기까지 요금을 내지 못했던 기간이 꽤 길게 이어졌을 거라고 추측했다. 전기가 곧 끊어질지도 모를 000호 주민을 생각하니 조금 씁쓸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의 사정에 이렇게 많은 생각이 떠오른 건 순전히 <아무도 모른다>의 영향이었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한 편을 골라보라고 하면 나는 수많은 명작 사이에서도 주저 없이 <아무도 모른다>를 고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제 방임 학대 사건을 모티프로, 엄마에게 버려진 네 명의 아이들이 살아남는 이야기를 다뤘다.

 

네 아이의 삶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건 악랄한 악당 같은 게 아니다. 쌓여가는 통지서, 요금을 낼 수 없는 아이들, 그 결과로 곧바로 끊긴 물과 전기였다. 그 누구에게도 관리받지 못해 꾀죄죄해진 아이들은 존재 자체로 자신들이 버림받았음을 알린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3.

로이 야콥센의 소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읽었다.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바뢰이 섬에 사는 바뢰이 가족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평면.jpg

 

 

바뢰이 섬이 특이한 이유는 철저히 한 가족 공동체에만 맞춰진 곳이라는 점이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섬의 이름은 가족의 성에서 따왔고, 이 섬에는 오로지 바뢰이 가족들만이 산다. 그들과 세상을 이어주는 건 가끔씩 찾아오는 몇 척의 배일 뿐이다.

 

소설은 갓 태어난 잉그리드가 어엿한 섬의 주인이 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에 비해 소설의 분량은 274쪽으로 절대 두꺼운 편이 아니다. 게다가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소설이므로 독자들은 잉그리드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그녀의 성장을 함께했다고 실감할 수 있는 건 서서히 성숙해지는 태도와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그녀의 나이이다. 책에서 갓난아기였던 잉그리드는 세 살이었다가 일곱 살이 되고, 열두 살이 되었다가 어엿한 성인이 된다.

 

이 점은 잉그리드의 고모인 바브로의 아들 라스도 마찬가지다. 뱃속의 태아로 소설에 등장했던 라스는 끝에서는 잉그리드와 함께 섬을 책임지는 어른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기나긴 성장이 급작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 역시 섬세한 묘사와 자주 언급되는 나이 덕분이다. 소설 말미에는 이를 나타내는 직접적인 문장도 나온다.

 

 

한편 잉그리드는 어른이 된 지 10년이 되었다. 라스는 태어난 이후 쭉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섬에는 어른 셋과 아이 둘이 살고 있다.

 

- p.244

 

 

소설 초반부에 집안의 가장 한스 바뢰이는 딸 잉그리드에게 폭풍이 방금 막 가라앉은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한다. 딸에게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에 폭풍이 격렬한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한 것이다. 한스는 바다를 보며 잉그리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폭풍은 널 해치지 못해.”

 

이 부분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소설이 가족들이 연대하며 역경에 맞서 싸우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예상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끊임없이 닥쳐오는 시련에도 바뢰이 가족들은 굴하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그 감동적인 연대가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어린아이들마저 최선을 다해야 한단 말인가. 왜 잉그리드와 라스가 저렇게 빨리 어른이 돼야 한단 말인가.

 

바뢰이 섬은 자급자족의 세계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섬 안에서 찾거나 한스가 타지에서 일하며 얻는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성별이나 나이를 중심으로 가장을 정하는 기존 유교 사회와 달리 바뢰이 집안에서는 공동체에 제일 큰 역할을 기여하는 사람이 곧 가장이다. 한때 바뢰이 섬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한스의 아버지 마틴은 늙어가면서 가장의 위치를 박탈당한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한스 역시 가장의 기능을 상실하자 초라하게 퇴장한다.

 

라스와 잉그리드의 성장이 직접적으로 묘사된 문장이 담겨있는 문단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이들만 남자 섬의 모든 것이 달라졌다.

 

- p. 244

 

 

잉그리드는 바뢰이 섬에서 새로운 존재를 맞이하기도 하고, 익숙한 존재를 떠나보내기도 한다. 라스를 비롯한 새로운 존재들은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외부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며 바뢰이를 떠나는 익숙한 존재들은 섬을 지탱하는 가장들이었다. 잉그리드는 바뢰이에 남아 떠나간 어른을 대신해 어른에 의해 버려진 아이들을 책임진다.

 

가장 똑똑하고 건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바뢰이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이 된 잉그리드를 보며 <아무도 모른다>의 어른 아이 아키라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아이들의 엄마는 집을 떠나기 전에 장남 아키라에게 동생들을 잘 돌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에 따라 아키라는 버려졌다는 것에 절망할 시간도 없이 어떻게 하면 동생들을 책임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말이다.

 

자연과 맞서 싸우며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세계와 공과금을 내줄 어른이 없는 <아무도 모른다>의 세계 모두 아이가 짊어지기엔 너무나 가혹하다. 물론 두 작품이 완전히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잉그리드는 가족들에게 버림받지 않았으며 소설의 가족은 영화보다 훨씬 따뜻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일찍 철든 아이는 상황과 상관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나의 연민은 편협하다. 누군가 내게 그렇다면 바뢰이 섬의 어른들이 어떻게 잉그리드를 키워야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할 말을 찾기 힘들다. 잉그리드는 바깥 세상에서 섬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어쩌면 잉그리드에게는 바뢰이 섬에서 가족을 위해 노동하는 삶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쉽사리 연민의 시선을 거둘 수 없다. 잉그리드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것들 중에서 일찍 철들지 않아도 되는 삶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길 바랐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그리드를 섬 밖으로 꺼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평선 너머에서는 잉그리드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다.

 

4.

통지서를 지나치고 집으로 가면서 000호에는 사람이 아예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었다. 사람의 존재가 고작 고지서를 통해서만 파악된다는 것이니 말이다. 사정이 어떤진 모르겠지만, 000호에 전기가 끊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른다>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법률적으로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이의 눈에 보여야 하고 인식되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전반적으로 고요하다. 중반부까지 나는 이 고요가 평화로웠다. 외부 세계와 차단됐기 때문에 위협받지 않고 안정적인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도움을 청할 이가 제한적이라는 점은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온다.

  

어른이 된다는 건 세상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 나는 아키라와 잉그리드가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늦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이 바람이 실현되려면 고지서가 아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눈에 담아야 한다.

 

 

*


보이지 않는 것들
- THE UNSEEN -


지은이
로이 야콥센(Roy Jacobsen)
 
옮긴이 : 공민희

출판사 : 도서출판 잔

분야
노르웨이소설

규격
130×195(mm) / 페이퍼백

쪽 수 : 276쪽

발행일
2021년 03월 08일

정가 : 14,200원

ISBN
979-11-90234-13-9 (03850)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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