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나의 보조관념이 보여주는 극과 극의 원관념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3.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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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가장 큰 매력은 비유를 통한 의미의 전달이다. 비유란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다. 비유를 통해 추상적인 감정이나 현상 또한 직접 보이는 대상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더욱 예술적이게 설명하는 동시에 강한 지적·정서적 효과를 낼 수 있다.


많은 시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비유의 보조관념은 “새”이다. Emily Dickinson의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와 Sylvia Plath의 “Elm”에서도 “새”라는 보조관념이 등장한다. 두 시에서 “새”라는 보조관념이 어떤 원관념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각각 살펴보고 나의 삶 속에서 “새”란 무엇인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by Emily Dicki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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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Emily Dickinson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

That perches in the souls -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 

And never stops – at all -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ted -

And sore must be the storm -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

That kept so many warm -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

And on the strangest Sea -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희망은 깃털 달린 것 ─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깃털 달린 것 ─ 

영혼 속 횃대에 앉아있다 ─ 

그리고는 가사 없는 곡조로 노래 부른다 ─ 

그리고 멈추지 않는다 ─ 전혀 ─ 


그리고 가장 달콤하게 ─ 질풍 속에서 ─ 들려 온다 ─ 

그리고 폭풍은 쓰라릴 수 밖에 없다 ─ 

폭풍은 그 작은 새를 당황 시킬 수 있다 

아주 많은 따뜻함을 가졌던 그 작은 새 ─ 


나는 가장 추운 땅에서 그 소리를 들었었다 ─ 

그리고 가장 낯선 바다 위에서 ─ 

그러나 ─ 결코 ─ 그 어떤 극한에서도, 

그것은 빵 부스러기 하나 요구하지 않았다 ─ 내게.

 

 

Emily Dickinson의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는 희망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시이다. 이때, 희망을 깃털 달린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며 희망이라는 원관념을 새라는 보조관념으로 설명한다. 희망이라는 새는 영혼 속 횃대에 앉아서 멈추지 않고 가사 없는 곡조를 불러준다. “가사 없는 곡조”에서 곡조를 불러 희망은 주지만 길을 알려주지는 않는 희망의 잔인함을 볼 수 있다.

 

이런 곡조를 끊임없이 부르는 새로 인하여 희망을 그만 느끼고 싶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르게 희망을 계속 느낄 수밖에 없다. 희망이라는 새는 삶의 역경인 Gale, chillest land, strangest sea에서도 계속해서 노래를 부른다. 이와 같은 힘든 상황에서 인간은 희망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데 이를 Dickinson은 새의 노래가 더욱더 달콤하게 들린다고 표현하였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매우 많은 순간에 다양한 희망을 요구한다. 이는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희망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희망이라는 새는 어떤 삶의 극단 속에서도 빵 부스러기 하나 요구하지 않는다고 묘사한 부분이 잘 설명된다. 즉 나는 희망에 대한 선택권이 없고 단지 수동적으로 부여받을 뿐이다.

 

 

 

Elm by Sylvia Pl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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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m

                          by Sylvia Plath

 

For Ruth Fainlight


I know the bottom, she says. I know it with my great tap root:   

It is what you fear.

I do not fear it: I have been there.


Is it the sea you hear in me,   

Its dissatisfactions?

Or the voice of nothing, that was your madness?


Love is a shadow.

How you lie and cry after it

Listen: these are its hooves: it has gone off, like a horse.


All night I shall gallop thus, impetuously,

Till your head is a stone, your pillow a little turf,   

Echoing, echoing.


Or shall I bring you the sound of poisons?   

This is rain now, this big hush.

And this is the fruit of it: tin-white, like arsenic.


I have suffered the atrocity of sunsets.   

Scorched to the root

My red filaments burn and stand, a hand of wires.


Now I break up in pieces that fly about like clubs.   

A wind of such violence

Will tolerate no bystanding: I must shriek.


The moon, also, is merciless: she would drag me   

Cruelly, being barren.

Her radiance scathes me. Or perhaps I have caught her.


I let her go. I let her go

Diminished and flat, as after radical surgery.   

How your bad dreams possess and endow me.


I am inhabited by a cry.   

Nightly it flaps out

Looking, with its hooks, for something to love.


I am terrified by this dark thing   

That sleeps in me;

All day I feel its soft, feathery turnings, its malignity.


Clouds pass and disperse.

Are those the faces of love, those pale irretrievables?   

Is it for such I agitate my heart?


I am incapable of more knowledge.   

What is this, this face

So murderous in its strangle of branches?——


Its snaky acids hiss.

It petrifies the will. These are the isolate, slow faults   

That kill, that kill, that kill. 

 

 

느릅나무

                실비아 플라스   

  

루스 페인라이트를 위해


나는 밑바닥을 알아, 그녀가 말한다. 나는 그것 을 나의 크고 곧은 뿌리로 안다: 

그것이 당신이 두려워 하는 것. 

나는 그것이 두렵지 않다: 나는 그곳에 다녀왔다.


너가 내안에서 듣는 것은 바다인가. 

바다의 불평인가? 

혹은 당신의 광기였던, 무(無)의 목소리인가?


사랑은 그림자. 

사랑이 끝난 뒤 어떻게 당신이 거짓말을 하고 울부짖었는지 들어보라: 

이들은 사랑의 말발굽소리이다: 사랑은 말처럼 가버렸다.


밤새도록 나는 이렇게 격렬하게 질주하리라. 

너의 머리가 돌이 되고, 당신의 베개가 잔디 가 될 때까지, 

메아리치며, 메아리치며.


아니면 내가 당신에게 독의 소리를 가져다줄까? 

지금 비가 온다, 이는 커다란 쉿 소리. 

그리고 이것은 비의 열매: 비소처럼 흰 양철 빛.


나는 일몰의 잔인함을 참고 견디어 왔다. 

뿌리까지 그을려서 

나의 붉은 혈관은 한 묶음의 전선, 불 타며 견딘다.


이제 나는 흩날리는 카드 패처럼 산산히 조각 나 버렸다. 

거친 폭력의 바람은 

이 그 어떤 수수방관도 참지 않으리라: 나는 소리 질러야 한다.


달 역시, 무자비하다: 그녀는 나를 끌고 다니리라 

잔인하게, 그녀가 불모라면. 

달의 광휘가 나를 상해 입힌다. 아니면 아마도 내가 그녀를 붙잡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떠나보낸다. 나는 그녀를 떠나보낸다. 

왜소하고 납작해진 그녀를, 마치 과격한 수술을 받은 후처럼 

너의 악몽이 어떻게 나를 소유하고, 나에게 어떻게 재능을 주었는지를.


내 속엔 울음이 산다. 

밤마다 을음은 파닥거리며 

나와 갈고리를 들고, 사랑할 무언가를 찾는다.


내 안에 잠자는 

이 어두운 존재가 나는 무섭다. 

하루 종일 나는 그것의 부드럽고 깃털 달린 움직임들을 느낀다, 그것의 악의를.


구름은 지나가고 흩어진다. 

저들은 사랑의 얼굴들인가, 저 창백하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이 때문에 내가 심장을 그토록 동요했나?


나는 더는 알 수 없다. 이건 뭔가, 나뭇가지가 죄어드는 것 속에서 그토록 살인적인 저 얼굴은?


그것의 뱀 같은 산(酸)의 쉿 소리. 

그것은 의지를 돌로 만든다, 

그것들은 고립 되고 느린 단층이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는 

 

 

Sylvia Plath의 “Elm”은 더 이상 참지 않고 폭력성(강한 힘)을 가진 여성 자아로 거듭나겠다는 Sylvia Plath의 각오가 담긴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느릅나무이며 크고 곧은 뿌리로 밑바닥을 경험하여 사랑의 허상과 실체를 알아낸 Sylvia를 의미한다.

 

이 느릅나무는 자신 속에 울음이 산다고 한다. 이 울음은 밤마다 파닥거리면서 갈고리를 들고 나와서 사랑할 무엇을 찾는다. 즉, 여기서 울음이라는 원관념이 “새”라는 보조관념에 의해 비유되고 있다. 느릅나무는 새의 부드럽고 깃털 달린 움직임을 악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즉 느릅나무는 자신 속에서 울음이라는 새가 사는 것을 원치 않는데 새가 자기 마음대로 둥지를 만들어 자리를 잡아버린 부정적인 상황이다.

 

두 시를 통해 “새”라는 하나의 보조관념이 각각의 시에서 대조적인 2개의 원관념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에서는 희망이라는 원관념을 설명하는데 “새”는 나에게 먼저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갈구하는 대상이다. 반면 Elm에서는 울음이라는 원관념을 설명하는데 느릅나무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찾아와 내부를 차지해버리는 존재이다.

 

이처럼 하나의 보조관념은 다양한 원관념을 설명할 수 있고 심지어는 위의 두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히 대조되는 대상을 비유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즉, 하나의 원관념을 수많은 보조관념으로 설명할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보조관념으로 다양한 원관념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며 시의 매력이다.

 

 

 

What does "bird" mean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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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y Dickinson, Sylvia Plath가 아닌 나, 박세윤에게 “새”란 나 자신, 친구, 가족을 포함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새”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V자로 대형을 맞춰 날아가는 새의 무리이다. 어렸을 때 가지런하게 V를 만들어 날아가는 새들이 너무 신기해서 며칠 동안 관찰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 나에게 의문을 가져다준 것은 V 점의 꼭짓점에 위치한 새가 가끔씩 뒤쪽에 있는 새와 자리를 바꿔가면서 비행을 이어나가는 행동이었다. 그 의문점에 대한 답은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얻게 되었다. 새들의 위치 변화는 바로 공기저항을 가장 많이 견뎌야 하는 V 점의 꼭짓점에 위치한 새가 지치지 않고 비행할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동료 새들의 배려임을 알 수 있었다.

 

어린 나는 새들의 따뜻한 배려와 동료애에 감동받았고 커가면서 V자는 내가 바라는 삶이 되었다. 나는 나의 삶 속에서 V자 대형 속의 새처럼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기꺼이 대신해 주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한 반대로 내가 너무 힘들 때 내 곁으로 다가와 따스함을 건네는 친구와 가족이 있는 삶을 바란다. 즉 나에게 “새”란 나, 친구, 가족이며 내가 바라는 삶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새의 V자 대형과 같은 삶이다.

 

 

[박세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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