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끝없이 환상적으로

환상의 세계로 떠날 때
글 입력 2021.03.15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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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책장의 책들을 거의 다 정리한 일이 있었다. 벽 한쪽이 모두 책으로 도배되어 있을 만큼 많은 책들은 점점 쌓이고 쌓여 어느 새 과하게 늘어나고 있었고 마침 준비중이던 이사를 핑계 삼아 책을 정리하라는 엄마의 명령이 떨어졌었다.

 

워낙 버리는 것을 시원시원하게 하지 못했기에, 거기에 책은 소장해야 가치가 있다며 굳이 굳이 빌리기보다 구매하던 나였기에, 그 정리가 마냥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중에 고르고 고른 소중한 책 몇 권은 아직도 소장 중이다. 어쩌면 수많았던 책들과는 별개로 정말 내 것이 된 책은 그것들이 전부였는지도 모르겠다.

 

그 중 한권이 바로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이다. <모모>의 작가로 유명한 그의 또 다른 소설 <끝없는 이야기>는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어느 한 서점에서 마주했다. 아마도 퇴근하는 아빠를 만나러 엄마와 함께 나온 서울의 어느 한 서점이었던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사라는 말에 한참을 이 책 저 책 뒤집어보던 나는 끝내 끌리는 책을 찾지 못하고 발걸음을 떼던 참이었다. 그 순간 책장의 맨 꼭대기 잘 보이지도 않던 칸의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간결한 글씨체로 쓰인 ‘끝없는 이야기’라는 제목에 홀린 듯이 다가섰다. 저 책을 꺼낼 수 있냐 물었고 그렇게 끝없는 이야기는 나의 손에 쥐어졌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적 소설이라기에는 참 두껍고도 화려하지 않은 책이었다. 책장의 꼭대기에서 꽤 시간을 보낸 듯이 손 끝에서는 건조한 먼지가 느껴졌다. 그 때 이 책의 무엇에 끌렸는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마치 사랑에 빠지듯 아주 강렬했다는 점과 그 순간 꼭 이 책 이어야만 했다는 점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야기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점에서 훔친 소설을 읽던 소년 바스티안은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설 속으로 모험을 떠난다. 책을 읽던 독자가 직접 소설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는 온갖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두려우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흘러간다. 그 모험들을 말하자면 말 그대로 끝이 없을테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이니 다음 기회에 얘기하도록 하겠다(아마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이 말을 알 것이다).

 

아무튼 그 때의 나는—어쩌면 지금까지도—허구의 이야기에 빠져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바스티안처럼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멋진 마법사가 나타나 나에게 임무를 부여해주지는 않을까?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가지는 건? 지브리의 <고양이의 보은>처럼 고양이 왕국에 초대받을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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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환상적인 일들에 휘말리기보다는 삶의 총알 같은 속도에 이끌려가느라 휘청거렸다. 그 속도에 나의 속도를 맞추느라 어느 새 멋진 생각들은 저 멀리 사라졌다. 환상에 관한 일들도 나를 떠난 지 오래인듯 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나의 마음 한 켠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장르를 조금 바꾸어서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책보다는 영화를 많이 보기 시작했다. 특히나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더욱 그랬다. 책과는 다르게 환상보다는 현실적인 내용들을 주로 보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들어가있는 나를 꿈꾸는 건 변함없었다. 영화 속 화면처럼 아름다운 미장센에 극적인 음악, 그리고 모든 클로즈업이 나를 향하는 시선까지. 이 모든 것이 마치 내 인생에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어쩌면 아예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삶에서 가장 극적이었던 부분들만 잘라낸다면 어찌저찌 무언가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영화는 잘 팔리는 상업영화는 절대 아닐 것이다. 평론가로부터 좋은 평을 받는 예술영화 또한 아닐 것 같다. 내 영화는 소소하고 때로는 지루하며 상영관도 몇 개 열리지 않는다. 상영시간표에서 사람들은 내 영화의 시간을 지나쳐 다른 화려한 영화들을 관람하리라. 아마 대부분은 이런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그 중 몇 명은 끝까지 관람하며 자리를 지킨 뒤 이렇게 말 할 것이다. 꽤나 재미있는 영화였다고.

 

<끝없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바스티안과 서점 주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는 환상 세계로 절대 갈 수 없는 사람, 갈 수 있지만 영원히 머무는 사람, 그리고 가서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환상 세계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그 사람들이 두 세계를 건강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나는 그 어디쯤에 있는 걸까. 삶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난 환상 세계로 절대 갈 수 없는 이는 아니다. 이미 다녀온 적이 있기에 그렇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 것 또한 아니다. 나는 이미 현실을 살고 있다. 설마, 혹시 그렇다면, 내가 바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바로 그 행운아인 걸까?

 

한 때는 환상이란 것에 실증이 나기도 했다. 나의 미래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발목을 잡는 듯이 느껴졌다. 이미 나는 현실에 있음에도 더욱 더 현실에 살아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 인생 자체는 평범하겠지만 사실은 환상 세계와 현실을 이어주는 멋진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을 깨달았다. 그 역할은 꽤나 비밀스러운 것이어서 남들은 쉽사리 눈치채지 못한다. 아주 가끔 만나는 나와 비슷한 행운아들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눈에 띄는 영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슬프거나 서운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환상 세계로부터 생명의 물을 떠다가 현실의 갈증을 해소할 테니까 말이다. 또한 다행인 것은, 환상 세계만큼은 어른들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있다는 점이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며 나만의 일을 해야한다.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더라도 언제나 열려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제 현실에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닌 환상과 현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행운아가 되기를, 또 그렇게 많은 이들이 환상 세계를 다녀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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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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