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은 삶이 될 수 있을까 [영화]

글 입력 2021.03.0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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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었음을 알린다. 그러나 <원더풀 라이프> 속의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와 표정과 감정을 모두 문장에 담아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기에, 이 글을 읽고 난 뒤 조금의 흥미라도 생기길, 나아가 이 영화를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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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속에서 ‘살아감’을 직면하는 순간이 몇 번이나 될까. 우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살아지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제목에서부터 ‘원더풀’, ‘뷰티풀’, ‘판타스틱’과 같이 과할 정도로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할 때는 보통 두 가지 경우다. 단어 그대로 무언가를 칭송하거나, 혹은 비꼬거나. 이 영화의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화면 위로 올라가는 크레딧을 보며 생각을 고쳐먹었다. <원더풀 라이프>의 ‘원더풀’은 결코 조소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가 아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를 보고 난 뒤의 내 감상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은 유한하다. 기억은 덧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 유한함과 덧없음을 정면에서 마주보고.

 

 

 

삶을 기억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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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풀 라이프>는 삶과 죽음의 경유지인 ‘림보’를 배경으로 한다. 모든 망자들은 일주일 간 림보에 머물며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간직한 채 떠나고 싶은 한 순간을 선택한다. 림보에서 일하는 인물들은 그 순간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하여 망자들이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한다. 재현된 순간에 완벽히 동화된 망자들은 그 감정만을 안고 이계로 떠난다. 말하자면 이는 성불의 과정이다.

 

림보에 도착한 망자들은 이계로 넘어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를 앞두고 각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영화는 기억을 선택하지 못하는 인물, 선택하지 않는 인물, 쉽게 고르는 듯하다가 결국에는 선택을 번복하는 인물 등을 통해 생을 돌아보는 다양한 관점들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망자들은 카메라 정중앙에 인터뷰이처럼 앉아있다.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림보 직원의 모습은 보통 대화 중에 비춰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긴 호흡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모습을 관찰한다. 그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인터뷰하게 된다. “나는 어떤 순간을 고를 것인가.” 관객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나아가 자신과 인터뷰를 하게 만드는 것, <원더풀 라이프>의 가장 큰 의의와 목적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작게 웃게 되었던 이유는, 망자들이 고른 순간을 재현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아날로그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재현하기 위해 선풍기를 가져오고, 솜으로 구름을 만들고, 종이 벚꽃잎을 뿌린다. 재현 배우는 모두 림보의 직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만약 망자들이 완벽하게 이입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재현한 순간이 생각보다 리얼하지 않아서, 약간 어설퍼서, 그래서 그 때의 감정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성불하지 못하게 되나? 아쉽게도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아니,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표명하는 데에 가깝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망자들이 고르는 것은 ‘순간’보다 ‘순간의 감정’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분명 똑같은 주제로 말하고 있는데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누구나 겪어보았을 것이다. 나는 몇 년 동안이나 잊지 않은-못한- 소중한, 혹은 끔찍한 기억인데 상대방은 기억을 못하고 있어 외로워진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또한 모든 일은 그 일을 겪는 사람이 의미 부여를 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일’이 된다. 살아가는 일 자체는 덧없을지 몰라도, 그 위에 어떤 색을 칠하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기억은 너무나 강렬하게 남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림보의 직원들은 망자들이 고른 순간을 객관적,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보다는 망자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표정과 말투 등을 더듬으며 그 때의 ‘감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렇게 기억에 의미부여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당장 먹고 살기에 바빠 이런 고찰을 할 시간 따위 없는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는 훨씬 많다.

 

그리고 그런 생을 살다가 림보에 도착한 망자가 바로 와타나베라는 인물이다. 그는 70세의 전직 회사원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난하고 평탄하게 살아왔으나 기억에 남는 순간을 고르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는 그저 허무해보인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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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감정만을 간직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그 감정을 제외한 다른 감정들은 삭제된다는 뜻이다. <원더풀 라이프>의 세계에는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 모두에게 똑같이 원하는 순간을 고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며, 그 후에는 자신이 선택한 감정만을 가진 채 떠난다. 이 과정은 언뜻 구원과도 같아 보인다. 사는 동안 어떤 괴로움이 있었든 마지막 순간만큼은 자신이 고른 행복만을 누릴 수 있다는 거니까. 실제로 대부분의 망자들에게 그랬으리라.

 

하지만 다르게 볼 수도 있다. 내 삶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기억을 버리고 단 한 순간만을 골라야 한다는 것은 어렵다. 괴로운 일이다. 단숨에 고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사실이 와타나베에게는 동앗줄과도 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림보에서의 절차가 ‘구원’보다 ‘소거’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고,  3살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옷장 속에 들어갔던 때 보았던-느꼈던- 새카만 어둠을 마지막 기억으로 고른다. 다른 모든 기억들을 어둠 너머로 숨기려는 듯이.

 

이 소거의 과정을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게 하는 인물은 림보의 직원인 시오리이다. 그녀는 또 다른 직원인 모치즈키를 조용히 사랑하고 있기에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한다. 하지만 얼떨결에 그녀 자신의 손으로 모치즈키가 마지막 순간을 고르는 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고 만다. 카메라 워킹이나 구도에 큰 변화 없이 조용히 진행되던 영화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때가 바로 이 씬이다.

 

시오리는 옥상 위로 덮인 눈을 한참동안(실제로 이 씬은 꽤 길게 나온다.) 발로 차고, 던지고, 달리고, 헤쳐놓는다. 영화는 림보에 남겨지는, 즉 소거당하는 인물을 이토록 역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고르는 행위’가 아닌 ‘버리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단 한 순간만을 고른다는 것은 이렇게 잔인한 일이라고. 여기서 앞서 썼던 문장을 조금 고쳐야 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떤 순간을 고를 것인가”보다는 “어떤 순간을 지울 것인가”에 가까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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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와타나베의 아내는 사실 모치즈키의 약혼자였다. 모치즈키는 이미 림보에 머무른지 수십년이 되었다. 림보의 모든 직원들은 다른 망자들과 같은 질문을 받았으나 결국 고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삶 중 의미 있는 기억을 찾지 못해, 혹은 ‘찾아야할 이유’를 찾지 못해 긴 시간 동안 림보에 머물게 된 것이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결정을 돕기 위해 그의 인생이 담긴 비디오를 건네주고, 우연히 그 비디오에서 한 때 자신의 약혼자였던 여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깊은 곳에 잠겨 있던 기억이 떠오르는 듯한 얼굴을 한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아내, 즉 자신의 약혼자였던 여성이 이미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가 림보에서 골랐던 순간을 찾아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고른 순간은 모치즈키가 사망한 전장으로 떠나기 전 자신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조용한 이별의 순간이었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었지만 누군가가 고른 마지막 기억에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의 인생을 다시 돌아본다. 생각 끝에 모치즈키가 고른 것은 다름 아닌 림보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모치즈키는 마지막 순간에 렌즈를, 렌즈 건너편의 림보 직원들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관객들은 그 똑바른 눈빛을 마주한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쉬이 지나치고 마는 순간이 실은 너무나 빛나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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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의 삶


 

살아가는 일은 덧없다. 생은 유한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매 순간마다 상기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삶은 우리와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때로 잊혀진다. 너무 가까이에서 마주 보고있는 사람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에게 <원더풀 라이프>와 같은 영화가 있다는 사실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들이 완벽한 죽음을 앞두고 하는 생각을 멀리서 바라보며,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통해 죽음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함으로써 삶의 유한함을 절실히 깨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한함을 긍정하고 삶을 더욱 충실히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 멋대로 덧칠되는 기억은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강인한가. 삶은 기억의 합보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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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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