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는 사람을 살리는 약이다 -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

글 입력 2021.03.02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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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시를 시로 읽은 건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즈음이었다.

 

수시 발표가 막 나던 때, 지원했던 학교 중 한곳에서 탈락했다. 헛헛한 마음이었으나 그땐 마음을 돌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저녁을 먹곤 공부하러 면학실에 돌아왔는데 자리에 시 한 편이 놓여 있었다. 이정하 시인의 <바람 속을 걷는 법>이라는 시였다.


 

...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

바람이 드셀 수록 왜 연은 높이 나는지



이정하 <바람 속을 걷는 법>

 

 

시의 마지막 두 행이 주는 울림이 컸다. 그전까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눈물도 조금 났다. 적절한 때에 건네받은 시 몇 줄이 보기 보다 큰 위로와 힘을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나태주 시인 이미지.jpg

 

 

교보문고 전광판에 걸리며 큰 인기를 끌었던 '풀꽃 시인' 나태주 시인도 시를 통해 위로와 사랑을 전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해외 명시들을 엮은 책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온다>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전한다.




시가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고 부드러운 동행의 손길이 되어 나를 멀리까지 이끌어주었습니다. 바로 이 책에 실린 시편들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

 

울고 싶은 당신에게 이 시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목마른 당신, 외로운 당신에게 이 시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시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들이 당신에게 잃어버린 사랑을 데려다줄 것입니다. 당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더불어 약속해 줄 것입니다. 당신을 대신하여 기도가 되어줄 것입니다. 시가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이라는 믿음을 나는 한순간도 놓아본 적이 없답니다.

 

 

시집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헤르만 헤세, 괴테, 프랑시스 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시부터 작자 미상의 글이나 하이쿠까지 폭넓은 작품이 실려 있다.

 

시가 '사랑'을 데려온다는 전체 테마에 맞추어 순서를 구성했고 시의 옆엔 나태주 시인의 단상을 덧붙였다. 작품이나 시인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단 나태주 시인이 어떻게 시를 알게 되었는지, 시를 읽곤 어떤 마음을 느꼈는지에 대한 짧은 감상평에 가깝다.

 

사랑을 노래하고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시들이 많았다. 물론, 상실의 슬픔과 그를 다독이는 시도 많았다. 하지만 몽글몽글한 시들 사이에 유난한 서걱거림이 돋보이는 시가 있었다.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이다.

 

서정시 사이에 서정시를 노래하기 힘들다는 시라니. 기쁨과 위로를 전하고 싶다던 저자의 의도에 걸맞은 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책을 덮고도 브레히트의 시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 목소리는

듣기 좋고,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는 

질 나쁜 땅에서 자라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고 말한다.

 

해협 위의 색색의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그물이 눈에 띌 뿐.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언제나 따스한데.

 

내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는 오만함처럼 느껴진다.

꾳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경이와

거짓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마음 속에서 갈등하고 있다.

바로 이 두 번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새싹 나는 봄 같은 서정시 사이에서 겨울을 닮은 브레히트의 시가 더욱이 눈에 띄었다.

 

나태주 시인은 브레히트를 '앵그리맨'이라고 표현했다. 화를 내고 있는 사람, 자기의 문제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일로 화를 내고 있는 나이 든 앵그리 맨. 말미엔 이런 앵그리맨이 좋은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독일 바이에른 출생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위생병으로 병원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표현주의 연극에 심취하게 되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극작가, 시인, 무대연출가 등 다양한 직업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1933년 히틀러가 그를 정치사상범 명단에 올리며 브레히트는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병원에선 나치가 저지른 일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며, 그리고 이후엔 살아남기 위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전하며 상상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을 느꼈을 테다. 서정시가 노래하는 아름다운 풍경들과 가슴 따뜻한 처녀들에게 경외를 느끼기엔 그가 마주한 현실이 너무 각박했을 테다.

 

브레히트는 그 현실 속에서 느낀 경악, 분노, 회의 등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시에 녹여냈다.  몇 편 뒤에 소개된 브레히트의 또 다른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도 그의 분위기가 잘 전해진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운이 좋았던 덕분에

나는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나는 내가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힘든 시기를 지나오며 그는 많은 이들을 잃었다. 책에 소개되지 않은 다른 시 <사상자 명부>에서 브레히트는 먼저 떠나 간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기도 한다.

 

세게 1차 대전을 지나 2차 대전도 끝났고, 브레히트가 시를 쓴 지 몇 십 년이 지났지만 '강한 자는 살아남는' 현실은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때보다 더 심해져 지금은 '강한 자만' 살아남는 현실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면 너무 일찍 빛이 되어 떠나버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무해하고 아름답지만 여리디 여렸던 그들에겐 이 세상이 너무나 버거웠을 테다. 그들의 부재가 실감 날 땐 착하고 여린 사람을 끝끝내 떠나버리게 만든 세상에 대해 분노했다. 그러다 그 세상에서 구태여 끈질기게 살고 있는 스스로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럴 땐 견디지 못하는 마음을 견디기 위해 글을 썼다. 브레히트의 시도 비슷하게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아름다운 사랑 시가 읽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면, 브레히트가 쓴 시는 쓴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쏟아내지 않았더라면 안에서 곪아 썩었을 마음들을 그는 글을 통해 비워냈다. 그리고 그 글은 남아 서정시와는 또 다른 공감과 위로를 전한다.

 

책의 제목처럼 모든 시가 사랑을 데리고 오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브레히트의 시를 읽곤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을 느끼진 않았으니깐. 그러나 분명 시에는 힘이 있다. 간결한 문장과 구조 뒤엔 그를 뛰어넘는 강력함이 있다.

 

그렇기에 책의 제목에는 동의할 수 없으나 나태주 시인의 서문엔 매우 동의한다. 시는 사람을 살리는 좋은 약이다.

 


시가사랑을 입체사진.jpg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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