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한 생애 지난한 삶이었습니다. 이른바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날들이었지요. 누구도 살갑게 대해주지 않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는 날에도 위로해주거나 손 내밀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달래며 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 그러할 때, 진정으로 목이 마르고 다리가 팍팍할 때, 나의 마음을 달래주고 어루만져 준 것이 시였습니다. (4)
시는 위로다. 위로의 방식은 무엇인가? 시를 쓴 시인의 태도에서 비롯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시인은, '그 자리에서 멈추는' 사람들이다. 판단하기 전에 바라보기, 말 하기 전에 듣기. 시인의 들음과 바라봄을 그대로 쏟아낸 글자가 시가 된다. 그토록 무력하거나, 그만큼 깨끗하고 다정하다.
시에서 발견하는 시인의 태도에서 작은 희망을 본다. 글을 쓰는 태도가 곧 삶의 태도라면, 나 또한 그렇게 세상을 살고 싶다고 바라게 된다. 이런 시 혹은 말이 있다면, 그런 태도로 삶을 살 수 있다면 돈이 없는 게 그렇게 큰 문제인가 싶은 이상한 생각도 드는 것이다. 시인이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처럼 나 또한 문제를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어진다. 그런 태도로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
혹은 내가 한때 품었던 마음과 비슷한 모양을 시에서 발견하면, 내 감정과 경험이 틀린 게 아니었노라 확신을 얻기도 한다. 너무 찰나여서, 또는 오래돼서 선명하지 못한 어떤 감정과 기억, 경험이 가짜가 아니었다고. 그러니 내가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어떤 것들은, 지금 이 시간의 경험들은 실제로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너는 지금 그렇게 현실에 발 딛고 단단히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준다.
아래는 위로의 얼굴을 발견한 몇 가지 시에 관해 리뷰를 썼다.
제임스 매쉬의 시, <시>는 실패를 말하고 있다. 자기가 쓰고 싶었던 주제로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깨달음의 순간이 그대로 시가 되었다.
화자는, 어떤 성취에 한해서는 실패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니다. 그는 '쓰고 싶었으나 쓸 수 없는 것'과 자신에게 어쩔 수 없이 보여지기에 '쓸 수 있는 것'을 함께 고백했기 때문이다. 그는 '새벽, 새, 별' 대신 '상처받고, 묶이고,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것이다. 어느 한 쪽이 더 나쁘거나 좋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판단하기는 힘들 것이다.
언젠가 쓰고 싶다고 마음먹은 주제로 글을 시작하다가, 글을 쓰다 보면 방향이 틀어지는 경험을 몇 번 했다. 쓰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주제는 결국 쓸 수 없었다. 내가 기획력이 없어서, 혹은 의지가 약해서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사람에겐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 않고서는 차라리 죽고 싶을만큼 간절한 이야기가. 여기서 이야기는 사람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발견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자기도 어떤 걸 말할 수 있는지 모르는 채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 데 까지 가면, 이야기의 본 모습을 그제서야 작가는 마주하게 될 테다. 그 후에야 작가는 이야기와 같이 발을 맞춰 나간다. '진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이 예상이 얼토당토 않은 것일까? 적어도 이 시와 나의 경험을 비춰 보면 아주 틀린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 <옛날을 생각함>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친다. "도리스가 나를 사랑해주었다는 것을."
최근에 많이 사랑했던 어떤 사람과 아주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 흔하지 않은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가장 닮은 성질이 무엇인지 메모장에 적었다.
상냥함과 겸손함이 느껴지는 단어 선택, 그러나 왠지 본능적인 자기보호에서 근원하는것 같은 배려, 그럼에도 상대에 대해 두려움 없이 건네는 말투, 약간의 자조적인 수사, 어딘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섬세함과 예민함.
거침없이 적은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슬퍼졌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것들에 마음이 끌린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아무튼 옛날을 생각한다는 건, 막연히 먼 과거를 떠올리는 행위가 아니다. 수 년이 지난 지금 떠올리는 옛날일지라도, 그때의 특정한 누군가(도리스)를 현재에서 생생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만큼 생생한 진실은, 그때의 사람을 지금으로 불러올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옛날을 생각하는 건 대체로 슬픈 일일까.
기어 샤를 크로스의 시, <뤽상부르 공원에서>는 고독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생에는 꼭 건너야 하는 벽이나 장애물, 혹은 슬픔의 강이 존재한다. 똑같은 슬픔은 없고, 어떤 슬픔은 심지어 홀로 견뎌야 한다. 본질적인 인간의 고독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겪은 이 슬픔을 어린아이에게 예방하는 방법도 없다. 오직 시간과 사건만이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다. 가혹하지만 공평하다.
조르주 상드의 시 <상처>, 사랑할 용기를 심어주는 시다.
어떤 이는 상처받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은 아주 납득이 잘 되지만 조금 겁이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질문한다. 사랑하면, 얼마나 상처받아야 해?
하지만, 조르주 상드의 시는 마음을 담담하게 한다.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사랑의 목적을 말하고 있어서다. 사랑 앞에 상처는 부수적인 것이다. 그러니 상처가 더 크게 느껴진다면, 감내할 수 없는 상처만 부풀어오른다면 그건 사랑이 아닐 것이다.
때가 올 것이라고, 같이 믿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덜 힘들다. 사람이 없다면, 시를 옆에 두면 된다. 실상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연히, 시간은 흐르고, 바람은 불고, 계절은 돌아 오니까.
사실 기다림이 힘든 걸 알고 헤세가 한 마디 더 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한 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절실한 줄도 물론 알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