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드로잉을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였다 [미술/전시]

글 입력 2021.02.2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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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드로잉을 하지 않았다. 예전엔 작은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면서 지하철이든, 학교든, 집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때나 드로잉을 하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드로잉하기보다는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이 더 많아졌다.


눈과 손을 바삐 움직여야 하고, 준비물이 많은 드로잉과 달리, 핸드폰 사진은 핸드폰 달랑 하나만 챙겨서 대충 마음에 드는 각도를 찾은 후 셔터 하나만 누르면 되니 간편했다. 대학에 들어와 주로 퍼포먼스와 영상 작업을 하게 되며, 드로잉을 하는 시간이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다시 드로잉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전쯤, 우리 집에 아가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아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내 핏줄인 아기는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핸드폰을 붙잡고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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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 찍은 아기 발 사진

 

 

하지만 사진으로는 그 사랑스러움을 담을 수가 없었다. 물론, 모델이 좋으니 약간의 조명과 조리개 보정으로 애정 담긴 사진을 찍을 수는 있었지만, 아기를 실제로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사랑스러운 순간의 모습은 담을 수 없었다.


우유를 먹을 때 오물대는 오동통한 볼과 야무진 입술, 배고플 때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며 참새처럼 벌리는 입, 보드라운 머리카락, 숨 쉴 때마다 작게 들썩이는 어깨, 뭘 알긴 하는 건지 크게 뜨고 관찰하듯 바라보는 눈빛. 이 모든 순간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드로잉을 다시 시작했다. 감정이 없는 카메라와 달리,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인 나의 손으로 그린다면 이 사랑스러움을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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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드로잉 이미지

 


오랜만에 흑연 냄새가 나는 4B연필을 들고 드로잉을 해 보았다.

 

사실 콩테가 쓰고 싶었지만, 가루가 날려 아기 호흡기에 들어갈까 봐 연필을 사용하였다. 아이패드를 산 뒤로는 필기도 디지털 펜슬로 하게 되어, 오랜만에 잡는 아날로그 연필이 낯설었다.


하도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손이 굳은 건지, 처음에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드로잉이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 몇 장 그리다 보니 굳었던 손이 풀리며 아기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스케치북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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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를 안고 있는 이모 드로잉

 


순식간에 스케치북을 아기 드로잉으로 가득 채우며, 그동안 드로잉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의 삶에 이만큼의 애정을 붓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매일 바쁘게 지나가는 삶 속에서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핸드폰과 지갑 하나만 달랑 들고 집을 나선다. 매일 똑같은 길을, 똑같은 버스를 타고 똑같은 곳에서 일이나 공부를 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여 큰 애정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반복되는 일상이 어찌도 소중한지. 하루하루가 똑같아 보이지만 사실 꼼꼼히 살펴보면 날마다 사소하게 달라지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알 수 있다. 매일 아침 뜨는 해도 조금 일찍 일어나 일출을 맞으면,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는 빛이 얼마나 상쾌한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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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방에서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며 그린 그림.

 


그래서 이번엔 스케치북을 다시 나의 일상 풍경으로 채우기 시작하였다.

 

그림 연습을 하듯 드로잉하였던 예전과 달리, 이번엔 그 순간의 느낌을 담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 애정을 가진 것을 그리기 위해 시작한 드로잉이, 오히려 그리기 시작함으로써 일상의 것들에 애정이 생기게 만드는 것으로 바뀌었다.

 

매일 신고 나가는 신발이 소중해졌고, 산책로에서 참새 떼가 수다 떠는 장면을 목격하였으며, 집안 벽 한 면을 차지한 피아노의 흰색 건반이 보조 등 불빛을 받으면 은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방 한쪽에 들어간 작은 스케치북 하나로 이렇게 일상 속의 잔잔한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다. 오랜 시간 드로잉을 멈춰왔지만, 이제부턴 가방의 공간을 차지하더라도, 사진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히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드로잉을 다시 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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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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