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잭 더 리퍼' - "잭과 다니엘의 진정한 만남"

'타자화된 나' 마주하기
글 입력 2021.02.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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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더 리퍼 포스터.png

 

 

2016년 <잭 더 리퍼>는 류정한 배우의 진가를 다시금 느낄 수 있게 해주었고, 오랜만에 극을 보면서 카타르시르를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작품을 보면서 넘버 뿐만 아니라 가사도 매우 좋았고 Reprise(특히, 다니엘이 죽을 때 사용되었던 ‘어쩌면’ reprise 부분)가 적재적소에 쓰여서 극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역동적인 노래와 정적인 노래가 조화를 잘 이루어 비극적이면서도 인간의 광기를 극명하게 잘 드러냈다고 생각된다. 또한, 라이센스 작품인지 알고 있었는데, 재창작뮤지컬이라는 것을 알고 놀라웠다. 특히, 미지의 연쇄 사건이 시체 해부였다는 점에 착안하여 외과 의사라는 직업과 관심분야를 장기이식으로 설정하고 미지의 사건의 범인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앤더슨이 진실을 덮음으로써 하나의 사실로서의 사건으로 느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극의 짜임새가 탄탄했다고 생각한다.

 

본 글은, 뮤지컬 <잭 더 리퍼>를 표면적, 철학적, 현실적 관점으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본 내용에 앞서 '잭 더 리퍼'의 의미와 줄거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잭 더 리퍼 (Jack the Ripper)는 범인의 실제 이름이 아니다.

 

 

미상의 남성을 표현할 때 쓰는 '잭(Jack)' + '찢다'라는 의미의 '맆(Rip)'에서 '연장된 리퍼(Ripper)' = 찢는 자


한국말로 흔히 칼잡이 잭, 면도날 잭, 살인마 잭 등으로 번역된다.

 

 

뮤지컬 <잭 더 리퍼>는 영국에서 있었던 실제 미궁의 살인사건을 각색한 작품이다.

 

 

영국 사회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희대의 살인마는 수사망을 벗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세기말 영국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수사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였고, 범인이 남긴 것으로 추측되는 범행 현장의 낙서는 기본적인 조사도 없이 지워버리는 등 허술한 수사까지 더해서 사건 해결에 난항을 겪었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경찰에게 잭 더 리퍼 검거방법을 써 보내었고, 당시 영국 여왕인 빅토리아 여왕까지 검거를 독려했지만 범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잭 더 리퍼가 의료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장기를 적출한 기술이나 실력이 보통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깔끔했으며 타 장기에 손상 없이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잭 더 리퍼가 보통 이상의 교육을 받고 의학과 해부학에 능통하며 수술의 경험이 있는 사람, 침착하고 머리가 좋은 엘리트일 것이라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잭 더 리퍼에 대한 수사는 1889년 6월 용의자를 결국 잡지 못한 상태로 종료되었다. (가장 근접한 용의자는 3명이었다)


- 출처 : <잭 더 리퍼> 프로그램북

 

 

원작은 이반 헤쟈가 작사하고 바소 파테이르가 작곡한 체코의 뮤지컬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라이센스를 받아 공연을 하는데 있어 왕용범 연출이 기존 뮤지컬의 전개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스토리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성준 음악감독이 음악을 재작곡 및 편곡하게 되었다. 초연은 <살인마 잭>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으나, 이후에는 <잭 더 리퍼>로 제목을 변경하여 지금까지 공연 중에 있다.

  


 

Synopsis


 

 

1888년 런던, 강력계 수사관 앤더슨은 화이트채플 지역에서 연쇄살인으로 유명해진 '잭더리퍼'를 수사 중이다. 매춘부만 노리는 잔인한 살인 수법 때문에 언론에 공개하지 않고 조용히 수사하려 하지만 런던타임즈 기자 먼로는 코카인 중독자인 앤더슨의 약점을 노리고... 결국 앤더슨은 먼로에게 특종 기사를 제공하고 한 사건기사 당 천 파운드를 받는 거래를 하게 된다. 몇 일 지나지 않아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자신의 무능함에 폭발직전인 앤더슨 앞에 범인을 알고 있다는 제보자가 나타난다. 그는 미국에서 온 외과의사 다니엘이다. 며칠 후 런던타임즈에 잭더리퍼의 예고살인 속보가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치닫는다. 급기야 앤더슨은 함정수사를 계획하게 되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했던 또 다른 사건을 만나게 된다. 과연, 진짜 살인마는 누구인가? (출처 : <잭 더 리퍼> 프로그램 북 中)

 

 


1. 표면적 관점



1) 인물 간의 유사성 : <잭 더 리퍼> 잭 vs. <엘리자벳> 토드

인물에 있어서는 <엘리자벳>의 토드와 잭의 유사성을 느꼈다. 잭이 토드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함축하고 있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역할’적인 면에서 토드가 엘리자벳이 원하는 자유를 준다는 명분으로 주변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며 그녀를 유혹했던 것처럼 잭 또한 다니엘에게 장기를 구해준다는 명분으로 살인을 즐겼고 그를 살인의 길로 이끌었다.


 

2) 잭 더 리퍼 vs. 프랑켄슈타인

더 나아가 전반적인 극의 분위기적인 측면에서는 overture을 듣는 순간 프랑켄슈타인이 떠올라 이와 비교・대조하면서 보게 되었다. 전반적인 멜로디와 스크린을 사용하는 면이 이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개인적으로 프랑켄슈타인을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연출가와 음악감독이 같기 때문일 수도 있다. 먼저, 두 극에서 사용하고 있는 소재와 맥락이 비슷하였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신선한 ‘뇌’를 구하여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는 생명창조가, <잭 더 리퍼>에서는 신선한 ‘장기’를 구하여 죽어가고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는 한 의사의 광기이자 의지가 소재였다. 이러한 소재가 중심이 된 배경 또한 비슷하였는데, <프랑켄슈타인>에서는 빅터가 사랑하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서 생명 창조에 집착하게 되었고, <잭 더 리퍼>에서는 다니엘이 사랑하는 여인인 글로리아를 살리기 위해 장기매매를 통한 장기이식에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살인’이 일어났고 ‘사랑’은 순수함과 그것이 가지는 가치를 잃고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써 전락하게 되었다. 또한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잭 더 리퍼>에서의 글로리아와 <프랑켄슈타인>에서의 까뜨린느가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그 두 인물은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도 비슷하였다. 이에 ‘바람과 함께’와 ‘산다는 건’이 멜로디적인 뉘앙스는 달랐지만, 그 넘버의 역할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2. 철학적 관점



1) 프로이트의 '실수 찾기 : 잭의 휘파람

먼저, 잭이 나타날 때마다 ‘휘파람’을 분다. 이 휘파람은 프로이트의 ‘실수 찾기’를 바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수’는 한 개인의 수많은 특성 중 그 개인을 표현해 줄 수 있는 하나로서 그 행위를 통해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극에서도 휘파람을 즉, 잭의 등장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살인이 있을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잭’이라는 인물의 특성을 확실하게 나타내준다. (오페라에서는 특정 인물이 나올 때마다 특정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관객이 미리 그 인물의 등장이나 그 인물로 인해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이 존재한다)

 

 

2) 다니엘과 잭의 관계

다음으로 ‘내가 바로 잭’이라는 넘버를 부르는 신(scene)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동시에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럼 내가 살인마였나 / 내가 바로 잭 / 잔인한 살인마


- 내가 바로 잭 中 -

 

 

다니엘이 폴리를 죽이고 자신이 살인을 했다는 것을 지각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며 잭에게 문초한다. 그 순간 다니엘은 잭은 7년 전에 죽었고, 그 동안의 살인을 했던 잭이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장면에서는 다니엘과 잭이 팔을 벌리고 원을 그리면서 돌면서 서로를 진실된 상태로 마주보게 되면서 자신의 정체를 인정하고 그들의 관계에서 변화하는 우위를 표현하고 있다.

 

데미안-removebg-preview.png

 

이 장면은 데미안의 타자로서의 자아 인정부분[1]을 연상시키며 F.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한 디오니소스적[2], 아폴론적인 것인 것[3]이 서로를 마주보며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립하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다니엘은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지켜려고 하는 아폴론적인 성향이 강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잭은 돈을 받고 살인을 대행하는 연쇄 살인마로서 극단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폴론적이었던 다니엘은 ‘사랑’ 때문에 점점 아폴론적인 가면[4]을 벗고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즉 잭은 다니엘의 타자로서의 자아였던 것이다. 다니엘은 본래 자신의 직업윤리 의식이 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윤리를 깨기 위해서 타자로서의 자신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에 죽었던 잭을 타자로서의 자신으로 여기고, 자신의 살인을 잭을 방패로 삼아 행하였으며, 자신은 그 뒤에 숨었다. 이에 사실을 안 뒤에도 잭이 다니엘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아폴론적인 가면이 완전히 깨져버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광기가 다니엘을 완전히 삼키면서 다니엘이 우위권을 잡는다. 이러한 장면은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대립을 보여주면서 이 둘은 양립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3. 현실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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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최신 뉴스

...

자 향긋한 돈 냄새


- 특종 中 -

 

 

수많은 예술작품이 현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는 만큼 이 작품 또한 자본주의적 논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자본의 논리에 속박되어 있는 몬리가 기자로서의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 특종만을 찾아다니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특종은 대중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것이어야 하며,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서이다. 몬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겉으로는 살인사건이 끔직하고 잔인하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흥미진진해 한다. 이것은 극에서 쇼 스타퍼의 역할을 하는 쇼 맨이 ‘춤추는 살인마’를 부르며 클럽에서 ‘잭’을 스포트라이트 하여 표현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기사에 자극적인 제목을 설정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기자들의 모습과 이러한 현상을 이끌어 내게 된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이것에만 관심을 갖는 대중의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어떠한 문제에 있어 그것이 특종이 될 수만 있다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거나 공감하게 하여 그 논지를 흐리게 하여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몬리가 연쇄 살인마가 절대 악의 존재가 아닌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음을 강조하여 로맨스를 강조하려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비록 사랑이 인간의 감정 중 중요한 감정이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기본적인) 가치는 맞지만, 이렇게 사회계약설을 파괴하고 다른 사람의 생명권을 앗아가는 범죄적 행위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절대로 타당할 수 없다. 따라서 앤더슨의 행위는 비록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이 중심이 된 피해자들의 죽음을 몬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의 들러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사실을 덮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의 알권리를 침해했다고는 비판받을 수는 있으나 도덕적 가치 판단에 있어서는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는 몬리와 앤더슨의 가치관의 대립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사회 또한 이러한 감정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을 지배하여 잘못된 것을 ‘아름다움’ 또는 ‘사랑’으로서 정당화하고 있는 도덕적 판단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아야 한다.

 

 

 

마치며


 

이 뮤지컬은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살인을 그린 작품으로 보여진다. 창작진들의 상상으로 덧붙여진 전개과정은 정말로 그럴듯 하다. 이 속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잭과 다니엘의 관계이다.

 

나를 직접적으로 마주보기 위해서는 나를 '타자화된 나'로서 바라보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헤겔의 정반합의 논리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나(正)를 부정함으로써 타자화된 나(反)가 도출되고, 나와 타자화된 나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함으로써 화합된 진정한 나(合)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직접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데 있으며 이로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순간이 바로 이 극에서는 다니엘이 자신이 곧 잭이었음을 깨닫는 부분이다.

 

이 글을 보는 독자 여러분도 한 번쯤,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1]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악마를 의미하는 데몬(Dämon)에서 유래되었다. 이 때, 데이몬은 이 책에서 등장하는 아브락사스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락사스는 악마인 동시에 구원자이다. 즉, 데미안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악마라고 간주되지만, 동시에 기독교적 세계관 내에 있는 나(싱클레어)를 기독교적 세계 밖으로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이로서 결국 싱클레어는 자신의 세계를 데미안의 도움과 자기 자신의 힘으로 깨뜨리고 나오게 된다. 이 말을 표현한 유명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헤르만 헤세, 데미안) 자기만의 세계를 표상하는 ‘알’에서 깨어 나오는 메타포는 일단 죽음이 아닌 삶에의 의지를 나타내며, 자유로운 비상(飛上)을 꿈꾸는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 하겠다(박정희,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 헤르만헤세의 『데미안』과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 . 새는 꿈 속에서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하는데 이 변환점이 바로 주인공의 곡적 많은 성장에서 자아의 재편성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순간들을 함축한 메타포이다(박정희). 나아가 자기 구원의 가능성으로서 알을 깬 새가 날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의 신이다. 이 신은 천사와 악마가 일체를 이룬 것, 인간이면서도 짐승이며, 최고의 선이자 극단적인 악마로서 아브락사스를 말한다(박정희). 결국, 싱클레어는 외부의 자극인 데미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신의 알(세계)에서 나오고자 투쟁하며, 알을 깨고 나와서는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의 경계를 허물음으로써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된다. 결국 「데미안」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의 목표의 선의 추구가 아니라 선과 악의 공존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데 두고 있다(유헌식, 행복한 뫼르소).

 

[2] 정통 신이 아니라 인간에서 신이 된 서자인 디오니소스 신에게서 유래한 표현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하나의 순수하게 예술적인, 하나의 반(反)기독교적인 가르침과 평가를 고안한 것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명명하고 있다. 또한 아폴론적인 밝음과 절도에 대비되는 밤의 어둠과 심연, 혼돈 그리고 아폴론적인 평정에 대비되는 끊임없이 유동하고 변화하는 생명력, 포도주가 상징하는 것처럼 모든 사물들이 아폴론적인 개성과 차별과 구별을 극복하고 혼연일체가 되는 도취와 황홀경의 상태, 사지가 갈갈이 찢겨지는 죽음과 극복하고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는 용어로 쓰고 있다.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의미는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의 본래적인 성향을 의미하지만 모든 인간은 이를 감추고 살아간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너무나 강력해서 절대 그 자체로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반드시 아폴론적인 것을 통해서만이 구현될 수 있다. 또한 아폴론적인 것과 대립되는 성질로서 영원히 아폴론적인 것과 평행선을 이루게 되며 오직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3] 정통 신으로서 적자인 아폴론 신에게서 유래한 표현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태양과 같은 밝음, 이러한 밝음 아래서 모든 사물들이 드러내는 균형, 절도, 질서, 명료한 형태, 그리고 국가의 도덕이나 법률, 아름다운 가상(假像) 및 이러한 아름다운 가상을 형성하는 예술적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규칙적이고 질서적인 것을 의미한다.


[4] 아폴론적 가면은 모든 사람이 아폴론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본능을 숨기기 위해서 쓰는 것으로서 자신의 진실한 내면을 바라보게 하는 것을 방해하며 인간이 거짓으로서 삶을 살아가게 하는데 일조한다.

 

 

[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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