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를 엮는 낯선 태피스트리 - 진리의 발견 [도서]

마리아 포포바가 전하는 정교한 역사서
글 입력 2021.02.16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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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완독한다는 것을 비유하자면 일종의 마라톤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작가가 문장으로서 설정한 트랙을 따라 결말이라는 완주선을 향해 자신만의 페이스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진리의 발견>은 여태 경험해 본 트랙 중 가장 길게 느껴졌다. 총 839p로 맺어지는 책은 그 존재만으로도 위압감이 있어서 온전히 이 책과 호흡을 맞추는 경험이 가능할까 의문도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부담보다 기대로 느껴졌던 이유는 먼저 이 책을 읽어보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평론가들의 코멘트와 리뷰 덕분이었다. 아주 험준해보이는 등산길의 초입에서 머뭇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정상의 경치가 아주 장관이니 꼭 한번 등정해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는 느낌이었달까.

 

그렇게 마리아 포포바가 전하는 길고 긴 역사서의 여정길에 함께하게 되었다.

 

 

네 세기에 걸쳐 위대한 여성들의 삶에 과학계,문학계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더해 엮어낸 복잡한 태피스트리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 우리는 정교하게 연마된 지성들이 추는 왈츠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대부분 여성이며 대부분 성소수자인 이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기 위해 힘껏 노력한 인물들이다.

 

- 워싱턴 포스트

 

 

 

그녀는 앞을 보며 걸었다

마거릿 풀러


 

이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몇 가지의 풍경들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남성중심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여타의 주류 담론과 다르게, 여성과 소수자를 주류담론의 주체로서 여기는 것이었다.

 

책의 본문은 마치 일종의 등산 코스처럼 목차마다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중 마거릿 풀러의 파트 중 일부에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주체로서의 여성을 갈망하는 내용이 드러난다. '앞을 바라보며 그녀는 걸었고 고무시켰다. 칭찬이나 비난에 신경 쓰지 않았다. 전해야 할 메시지가있었다. (중략) 이는 풀러가 그 시대의 남녀에게, 우리 시대의 남녀에게 남겨준 최고의 선물이다.'라는 평으로 줄리아가 풀러를 극찬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진리의 발견>에서 여성학과 연결된 개념을 다룰 때 무척 현명했다고 느낀 지점은,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에 단순히 한 사람의 말과 삶으로서 그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과 역사,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 사회 전체의 거시적 관점 등을 아주 꼼꼼하게 엮어 그것이 납득 가능하며 타당한 것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거부감이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어떠한 주장을 제시하는 대신 사실 그대로를 연결하되, 그 말과 말, 사람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서 궁극적으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뉘앙스로서 은유하고 있었다. '그 두 여성이 살아온 인생의 길에는 마거릿 풀러와 《19세기 여성》의 개척자적인 영향력이 놓여 있었다.'라고 맺어지는 문단을 통해 작가가 풀러의 신념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지가 너무나 극명하게 전달된다.

 

 

 

정신에도 물질에도 얽매이지 않는

에밀리 디킨슨


 

<진리의 발견>에서는 많은 문학가들이 등장한다. 그 중 에밀리 디킨슨은 시와 예술, 작가로서 대중과 작품 사이에서 고뇌하는 창작자의 고통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서술한다.

 

'"왜냐하면 유쾌한 재능이 시대에 맞기 때문이니까요."라고요? 누구도 사람한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어째서 시한테는 그렇게 말한단 말입니까?'라는 디킨슨의 말은 대중에게 창작물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서 지켜야하는 긍지나 신념에 대한 환기를 하게한다.

 

예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 유쾌한 재능이 아니라는 사실, 대중에 취향에 맞추어 자신의 예술성을 왜곡하는 일이 '진정성의 날을 무디게 만들어 시를 예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만드는 일'이라는 문장에서 특히 울림이 컸다.


 

유명세를 얻기 위해서 실천하는 미덕은 악덕처럼 더러워진다. 상찬이나 고용을 위한 예술이 여전히 그 광채를 지키며 순수한 예술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 본문 인용 <오로라 리> 배럿 브라우닝

 

 

이 파트 역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디킨슨과 시를 중심으로 많은 말을 남기고 함께 살아간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느낀 것은 '태피스트리' 같다는 평론이야말로 이 책에 걸맞는 표현이었다는 생각이다.

 

실과 실을 직조해 패턴을 만들고, 완성을 했을 때 비로소 실과 실의 부분이 의미하던 전체를 볼 수 있는 태피스트리처럼, 사람과 사람, 일과 일, 말과 말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붙이는 이 책 전체의 서술 방식은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정신성들을 글이라는 매체로서 가시화 시키는 직조의 과정이 아닐까.

 

처음엔 이 방대한 양이 주는 압박감에 마라톤의 출발선 앞에 선 선수, 혹은 험준한 산 앞에 선 등산객 같은 심정을 느꼈었다. 책을 펼쳐보고 그 속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와 저자의 메시지가 품은 향기를 맡고난 뒤 느낀 점은 아주 길고 따뜻한 뜨개 목도리와 같다는 느낌이었다. 털실 하나 하나를 섬세하게 손수 엮어 길게 떠낸 목도리와 같은 책.

 

저자는 참고문헌을 밝히는 부분에서도 책에 담긴 각별한 애정을 강조하며 '서가 사이를 누비는 것 같은 느낌의 책'이라고 남겼다. 방대한 정보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며 한 폭의 태피스트리 작품을 만들어 내는 따뜻한 책. '진리'라는 이름이지만 사실 그 안에 함축된 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 잊고 살았던 가치로운 무언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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