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2차 세계대전 中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말하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2008
글 입력 2021.02.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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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면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 같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무조건 반은 선이고 반은 악일 확률이 있다고 답할 것 같다. 사실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몸 안에 선의 부피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느꼈었는데, 수천 년이 지나간 역사부터 시작해서 현대 사회에서 나오는 악랄한 사건을 듣고 보니, 인간에게 악은 어쩌면 필수조건처럼 따라오는 건 아닐까 하는 심오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악에도 가볍게 넘어가 줄 수 있는 범위가 있고 ‘인간이 터뜨린 행위가 과연 맞나?’싶을 정도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범죄가 있다. 너무 답답한 것은 이 악은 행동 결과로 나오기 전까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권력, 이기심, 충동, 악랄 등 그저 개인과 사회가 조금 더 편하게 살기 위해, 원하는 이익을 손에 넣기 위해 순식간에 발생되는 섬뜩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가 대 국가의 대전으로 인해, 인간이면 당연히 받아야 할 삶의 영위 따위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인생이 담긴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발발한 나치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쓰라린 슬픔과 역사를 더 늦기 전에 알아보고, 끝없이 재조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8살 소년이 나치 최고 엘리트 장교 아버지를 따라 베를린에서 폴란드로 이사하게 된다. 폴란드는 허허벌판에 놀 거리 하나 없는 삭막한 장소였다. 더 정확히 풀어 보자면 폴란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이다. 8살 소년 가족이 사는 집 건너편엔 철조망, 가스실, 소각장 등 대량 학살의 현장이 연기와 냄새로 뿜어져 나오는 잔인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였다.

 

 

파자마1.jpg

굶주림과 끝없는 노동으로 생기를 잃은 8살 슈무엘

 

 

8살 소년 브루노는 철조망을 하나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동갑내기 슈무엘을 만나게 되는데,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의아해한다. ‘왜 맨날 똑같은 줄무늬 파자마를 입는 거지?’

 

키도, 나이도 같은 두 동갑내기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다. 브루노는 슈무엘이 있는 곳을 농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곳은 바로 농장이 아닌 아우슈비츠의 강제수용소였다. 브루노는 자신의 집에 가사를 도와주는 유대인의 옷차림, 강제수용소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를 보면서 어딘지 모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만 어린 나이에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브루노에게 학업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브루노와 그의 누나에게 교육을 시킨다. “유대인은 사약하고, 또 고약하며, 말도 섞으면 안 된다.” 즉 이 말은, 인간으로 쳐다도 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을 의미하는 바를 교육하고 세뇌시킨다. 그러나 브루노의 눈에는 철조망에 건너편에 살고 있는 동갑 슈무엘은 자신과 같은 사람이었다. 브루노의 누나는 선생님의 말에 수긍을 하고, 독일인으로서 그 시대에 걸맞은 나치즘 의식이 심어졌지만, 브루노는 유대인을 바라보는 논리정연하지 못한 왜곡된 시선을 곧이곧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어느 날, 브루노는 일하러 자신의 집에 온 슈무엘과 큰 오해가 쌓였고, 브루노는 그 사건을 계기로 너무 미안해하고 마음에 큰 응어리가 생긴다. 그 후, 슈무엘과 매일 만나는 철조망 앞에 앉아 사과를 고하고, 슈무엘은 그 사과를 받아준다. 여기까지 영화를 볼 때는 브루노와 슈무엘의 다음 행보들이 쉽게 예측 가지 않았다. 어린 독일인 브루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도 않고, 더 새롭게 이야기가 펼쳐질 공간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데, 나치즘 시대의 홀로코스트의 잔인한 장면을 감독은 어떤 대사와 화면을 전환시켜 쓰라린 감정을 전달해 줄까. 내 머릿속은 여러 상황을 펼치기 바빴다.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점이 되는 대사는 슈무엘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우리 아빠를 잃어버렸어.” 수용소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이 말 한마디에 브루노는 슈무엘에게 아빠를 같이 찾아주겠다며, 다음 날 꼭 파자마를 갖고 오라며 신신당부한다. 철장으로 인해 넘어가지 못하니, 땅을 파 작은 몸을 여미고 슈무엘의 손을 잡고 자진해서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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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과 함께 수용소에서 아버지를 찾아다니다가, 이상하고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 나가고 싶어 하지만 친구가 우선이었던 브루노는 끝까지 슈무엘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8살 소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가스실로 끌려 들어간다. 옷을 벗으라고 해서 벗었는데, 브루노는 재가 되어 굴뚝에서 연기로 퍼져 스멀스멀 하늘로 올라가버린다.

 

**

 

줄무늬 파자마의 단어만 놓고 보면되게 아기자기하고, 사악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분위기의 단어가 떠올려지지 않는다. 사실 줄무늬 파자마란, 나치 시대 유대인들의 복장에 상징적인 것으로, 번호를 매겨 그저 일하는 용도로 쓰인 존재들을 암시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 철문에는 독일어로 ‘일하면 자유로워진다’고 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죄수복이라는 단어를 넣지 않고, 파자마라는 안락하고 따듯해 보이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8살 브루노의 시선에선, 슈무엘이 꼬질꼬질한 파자마를 갈아입지도 않고 매일 입어도, 세상의 온갖 잡탕 속에 빠져들지 않은 순수한 소년에게서는 그 파자마는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깨끗한 해석으로 내려졌던 것이다.

 

반대로, 이 순수한 소년의 아버지(나치 최고 엘리트 장교)를 보며 어른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잔인한 사건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 최고 엘리트 장교로서 유대인 학살에 대해선 감정적인 미동도 없었던 그가, 총책임자로 유대인 학살을 동조했던 그 장소(수용소) 안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직접 걸어 들어가 죽은 사실을 인식하자, 몸이 얼고 혼에 빠진다. 또한 브루노의 엄마이자, 그의 아내 또한 철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소리쳐 절규한다. 영화는 부모들의 괴성과 찢어질 듯한 표정을 보여주며 러닝타임을 서서히 마무리 짓는다.

 

브루노의 순진무구하고 더할 나위 없이 착했던 행동으로 인한 죽음은 가슴이 찢어질 듯 물밀려 차올랐지만, 그의 부모들의 날뛰는 감정선을 보고 있자니 괘씸해 펄쩍이는 감정도 성난 파도처럼 요동쳤다.


또한 이 영화의 여운은 아쉽게도, 수많은 유대인들의 안타까운 생보다는 브루노의 죽음에만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나 이 영화가 끝나고서 한 쪽에만 쏠려지는 안타깝고 슬픈 여운과 동시에 수많은 유대인들의 살벌했던 인생과 죽음에도 똑같은 여운이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동진 영화평론가는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고 말한다. 물론 같은 영화를 또 돌려 보는 이유는놓친 장면과 기법을 다시 보려는 이유로도 타당하지만, 인물들에게 느낄 수 있는 모든 여운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함도 포함되어 있다.

 

 

[조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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