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욕망하는 여성들을 위한 변명 [도서]

글 입력 2021.01.2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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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안방극장에서는 드라마 <펜트하우스>가 연일 화제다. 자극적이고 예측불가한 스토리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바로 천서진이다.

 

욕망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서슴치 않는 그녀의 모습은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이를 연기한 배우 김소연은 이번 드라마를 통해 인생 캐릭터를 경신했다. 이처럼 과거에는 착하고 순진한 여성 주인공이 대중들의 공감을 샀다면 최근에는 욕망에 솔직하고 누구보다 강한 '악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여기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악녀들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트렁크에 시체를 숨기고, 납치 자작극으로 부모의 돈을 뜯어내는. 냉소적이고 싸늘한 그녀들의 모습은 소위 말하는 ‘나쁜 여자’의 이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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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작가 정이현의 등단 작품으로, 이 책에는 8인의 ‘내추럴 본 쿨 걸’들이 등장한다.

 

그중 표제작인 「낭만적 사랑과 사회」의 주인공 유리는 자신의 여성성을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순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명품관에서 쇼핑하듯 남자를 고르는 유리는 낭만적이어야 마땅할 애정 관계에서까지 실리적인 모습을 보인다.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를 입지 않는다. (중략) 그애의 손가락은 점점 내 팬티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 팬티! 삼 년 동안 줄기차게 입어온, 양은솥에 넣고 푹푹 삶아댄, 누리끼리하게 변색된, 낡은 팬티! 팬티를 사수하는 것은 세상을 사수하는 것이다.
 


낮에는 의대생 상우를, 밤에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민석이를 만나는 유리는 그들에게 키스와 오럴은 허락해도 순결은 허락하지 않는다. ‘레이스 팬티를 입지 않는다.’는 선언적인 소설의 첫 문장은 유리가 자신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세워둔 규칙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필사적으로 사수해야 하는 유리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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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감래 끝에 만난 부유한 집 막내아들에게 건곤일척(乾坤一擲)을 결심한 유리는 완전무결한 첫날밤을 치르기 위한 10계명을 읊는다. 열 가지나 되는 항목이지만 결론은 하나로 귀결된다. '순결'해 보일 것. 이것은 우리 사회의 남성 중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억압하고 훈육해 왔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너희들 여자 몸이 어떤지 몰라?” 엄마는 식탁 위의 유리잔을 집어들었다. “여자 몸은 바로 이런 거야.” (중략) “금 가는 순간.” 사방이 일시에 고요해졌다. 엄마 입에서는 기어이 최후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끝장나는 거야!”
 

 

유리는 파트너인 남성들에게 기꺼이 순결하고 순종적인 여성의 역할을 수행해낸다. 유리가 꾸며낸 ‘가정에서 조신하게 키워져 통금 시간이 있고, 성에 어리숙하고 조심스러운 여성’은 성녀에 가깝다. 그렇기에 유리의 낡은 팬티는 단순히 섹스 어필의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성녀로서의 완전무결함을 지키기 위한 역할 수행임과 동시에 이질적인 유리의 욕망을 상징한다.

 

성녀로 대표되는 전통적 여성상은 여성의 역할을 집안의 천사로 제한하고, 성애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던 시대의 흐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작품 속에서는 여성을 유리잔에 비유하며, 여성의 신체를 물화해온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성애의 대상인 여성은 투명하고 아름다워야 하지만 처녀성을 잃고 가치가 없어진 여성은 집안의 천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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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남성 중심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여성에게 강요되는 전통적 여성성을 역이용한다. 사회의 상류층에 진입하기 위해 남성이 원하는 여성상을 위장하는 유리의 욕망은 오로지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비롯된다. 이때 유리에게 성적-애정 욕구는 단순히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써 인식된다.

 

비록 유리의 욕망이 남성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체제가 요구하는 여성적 페르소나를 연기함으로써 욕망 실현의 전략을 모색하는 유리의 모습을 통해 남성 중심적인 여성성의 개념을 풍자하면서 동시에 욕망하는 여성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특히 유리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성에 관한 적나라한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사랑의 낭만성에 가려져 터부시해 왔던 것들이다. 보통 사랑을 낭만적인 것으로, 이에 계산적인 사고를 들이미는 것을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학습해온 것에 대해 정이현은 그 이면에 집중하면서 낭만적 사랑 역시 사회적 요구가 만들어낸 시대의 이데올리기임을 폭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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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결혼, 가족과 같은 개념은 남성 중심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 질서로 존재한다. 이러한 질서 속에서 여성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가부장제 아래 여성성을 강요받는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기에 여성의 희생은 당연시되어 왔다.

 

그래서일까? 욕망하는 여성은 늘 악하게 그려져 왔다. 학창 시절, 미혼의 선생님에게 따라다니던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별명과 직급이 높은 여성 상사를 따라다니는 마녀와 같은 수식어처럼 마치 어떠한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사회적 욕망을 좇는다는 인식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팽배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유리는 애정 결핍도, 창녀도, 성녀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악녀도 자처하는 '내추럴 본 쿨 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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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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