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개껍데기는 어디에나 있다 :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 #4 [여행]

길에서 만난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일지 모른다.
글 입력 2021.01.2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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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 - 26.4km

아스토르가 Astorga ▶ 폰세바돈 Foncebadón

 

 

산넘고 물건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성가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 내가 자는 사이에 들어왔을 순례자들은 벌써 나갈 채비를 거의 다 한 채였다. 일어나자마자 마주하는 얼굴이 매일 새롭다는 것은 아직 적응해야할 숙제지만, 옅은 미소를 띠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면, 몇 년은 알고 지낸 친구처럼 따뜻함이 솟아나는 이 감각은 매일 느껴도 좋을 것 같다.

 

숙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잠을 깨고 다시 길 위에 오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하룻밤 있었다고 정이 든 알베르게를 나오기가 슬퍼서 나서는 걸음이 조금 머뭇거릴 뿐이다.

 

게으른 겨울의 해가 하늘을 옅은 색으로 느긋하게 바꾸는 동안, 아스토르가 시내를 천천히 걷는다. 익숙한 건물이 나타나 다가가보니, 어젯밤 사이먼, B와 맥주잔을 기울였던 카페. 불과 몇시간 전일텐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괜히 울컥한다.

 

이 곳, 아스토르가에서 낯선 사람과 맥주잔을 기울일 수 있는 날이 다시 올까. 산티아고까지 한참 남았지만, 언젠가 또 다시 오게 될거야, 생각하며 작은 도시와의 작별을 미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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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3일이나 걸었다고 시위를 하는지 발걸음이 더디다. 지난날 함께 저녁을 먹었던 친구들을 하나 둘씩 먼저 떠나보내다가 사이먼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그도 발바닥에 물집이 한가득이라며 천천히 걷겠단다.

 

“저는 그냥 생각 없이 걸어요. 이것도 익숙해지니까 처음에만 생각이 많지, 몸이 힘들면 나중엔 생각할 틈도 없더라고요.”

 

사이먼은 물 흐르듯 그렇게 길을 걷고 있었나보다. 미국에 살다가 한국 귀국을 앞두고 이곳에 온 사이먼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중간중간 저기를 좀 보라며, 미처 못 본 풍경들을 알려주곤 했다.

 

생각에 잠기면 땅을 보고 걷는 습관이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 때. 마치 알람이라도 울려주듯 사이먼이 가리킨 눈 앞의 풍경은, 지나치면 분명히 아쉬웠을 아름다움을 한 가득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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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그와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미국 정치 얘기까지 넘어갔는데, 도통 공감할 수 없는 발언을 한다. 보통의 나라면, '엇, 그건 아니잖아요.'라며 딴지를 걸었을 게 분명한데. 그런 얘기조차 그냥 길 위의 것이라 여겨져서일까, 아하,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신기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사실 흔한 일일지 모른다. 같은 지하철 역에서 내리는 이, 콘서트를 보려고 함께 기다리는 팬,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익명의 사람들. 모두 행선지가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순간 이 명료한 사실을 망각하게 되곤 했다.

 

하지만 산티아고에서는 당장 내 옆의 사람, 심지어 나를 지나치는 사람조차도 나와 행선지가 같다는 것을 안다. 마주치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인사가, 문득 들어간 음식점 주인이 응원의 메시지를 건넬 때, 조개껍데기와 노란화살표가, 저기를 보라며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치지 말라는 말이, 내가 그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거나 나와 다른 의견을 볼 때 얼굴을 찌푸리곤 했던 모습이 스친다. 어쩌면 벽은 내 쪽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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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목적지인 폰세바돈은 산 꼭대기에 있는 곳이었는데, 한바탕 눈이 쏟아졌었는지 경량패딩과 스포츠레깅스 차림의 나에게 가혹한 환경이 이어졌다. 슬슬 오르막은 가팔라지고 더 이상 앞을 갈 수가 없게 되기도 했다. 이곳이 길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개울도 건넜다. 이토록 ‘산 넘고 물 건너’에 적합한 경험이 또 있을까!

 

두툼히 쌓인 눈 위를 걷는 것은 아무리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도 무릎에 엄청난 압력을 준다. 이제 피곤한 기운을 넘어서서, 물리적 통증이 온 다리에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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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개울과 가파른 경사를 넘으니 도로를 따라 완만한 경사가 나왔고, 그를 따라 죽 몇시간을 걸었을까, ‘이쯤 했으면 힘있게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를 두 세번 정도 반복하고 나니 폰세바돈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숙소에 들어선 시간은 오후 네 시. 휴식 시간을 감안하면 오늘도 일곱여시간을 걸었다. 붉은 볼과 후덕한 미소가 사랑스러우신 오스삐딸레로가 지친 순례자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저녁을 먹는 중, 옆에 앉아있던 한 순례자가 내일이 바로 '서머타임'의 시작이란다. 자정이 지나면 새벽 1시 시점에 시계는 2시를 표시하게 된다. 어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도, 한 시간 일찍 일어난 셈이 된다. 자동으로 한국과의 시차는 여덟 시간에서 일곱 시간으로 줄어든다. 자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생각에 "역경이 좀 있어야 되지 않겠어"했던 소위 ‘순례자 마인드’는 통증 저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해도 채 넘어가지 않은 여덟시부터 몸을 누인다.

 

내일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내일도’에 한숨을 섞지는 않았다.  많이 쉬고, 조금 느리게 걷더라도 어쨌든 다음 마을은 보일 것이다. 이게 길인가 하는 의심은 이제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적어도 걸어야 할 길은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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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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