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시대, 우리들의 사랑 [도서/문학]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1981)
글 입력 2021.01.16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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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사랑은 무엇인가. 현시대의 사랑은 매스 미디어에 등장하는 연인 간의 사랑으로 너무 쉽게 치환되어 버리는 듯하다.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희망이 가득 찬 사랑은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워 괴리감이 느껴졌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랑이 모두 그런 종류였기에 개인적으로 사랑은 허상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는 최승자 시인은 기존에 알던 사랑과는 정반대의 사랑, 새로운 사랑을 보여주었다.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깝지만, 그래서 참혹하게도 확실한, 처염한 사랑이다.

 

최승자 시인은 『이 시대의 사랑』(1981)에서 사랑을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 이 시대의 무서운 사랑”(「이 시대의 사랑」)이라 칭한다. 시인에게 사랑과 삶, 세계는 곧 고통 혹은 죽음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시인은 세계와 끊임없이 불화한다. 작품 속의 주체는 불화와 부정 끝에 자신의 삶과 존재까지 비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은 역설적으로 그 부정을 통해 삶과 존재를 본다. 시집의 주체가 느끼는 처절한 고통과 불안이야말로 삶의 감각이자 증거다.

 

무엇보다 시인 앞에 놓여있는 세계는 가부장제 등 부당한 권력과 억압의 세계다. 시집의 화자는 그 권력 아래 타자화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데에서 오는 고통에 잠식되어 간다. 하지만 그 격렬한 고통과 자기 모멸은 곧 여성 주체의 표출을 의미한다. 동시에 분명한 한 인간의 실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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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의 첫 번째 작품인 「일찌기 나는」에서 화자는 자신을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로 비유한다. 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루머의 가장 근본은 존재하지 않음에 있는 것처럼 그는 “아무 데서나” 죽어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하지만 화자가 그런 존재가 된 까닭은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아무런 보호 없이 폭력적인 권력의 사회로 내몰렸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화자는 억압과 절망을 경험하며 끝도 없이 타자화된다.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일찌기 나는」 전문

 

 

『이 시대의 사랑』에서 여성 주체의 몸은 죽음과 파괴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어느 여인의 종말」은 “한 여자의 시체”를 그린다. 한때 뜨거웠고 빛났던 꿈과 희망은 좌절되었고, 그 몸뚱어리에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한 부끄러움과 절망은 “골수분자”처럼 뿌리 깊이 자리 잡은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뇌세포로 비유되어 “방바닥에 흥건하게”, “구더기처럼 꿈틀거린다”.

 

「술독에 빠진 그리움」에서도 절망은 “번개 광선처럼 그녀의 뇌 속에 침투”한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통이 깨어지면서 꿈과 함께 “좌르르 쏟아진다”. 터져버린 머리통에서 피와 뇌수, 즉 비체를 쏟아내는 여성의 육신은 황폐한 세계의 모습을 대변하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부정하려 한다.

 

시인이 부정하려는 권력은 다시 말해 아버지로 대변되는 남성 중심적 권력이다. 시인은 여성 주체로서 개인적인 몸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기존 권력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언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에서 화자는 “어느 개뼉따귀가 내 아버지인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살아계신 아버지도 하나님 아버지도 아니다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성 주체는 폭력과 억압의 근원인 그 모든 아버지를 부정한다. 그리고 그 권력으로부터 탈주하고자 택한 방식은 바로 사랑이다.

 

 

그리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날에 나는

또다시 치명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가리라

저 앞 허공에 빛나는 칼날

내 눈물의 단두대를 향하여

아픔이 아픔을 몰아내고

죽음으로 죽음을 벨 때까지

마침내 뿜어 오르는 내 피가

너희의 잔에 행복한 포도주로 넘치고

그때 보아라 세상의 어머니 아버지여

내가 내 뿌리로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것을

나의 불모가 너희의 영원한 풍요가 되는 것을

그리고 마음껏 기쁘게 마셔라

오늘의 나의 피, 내일의 너희의 포도주를


- 「슬픈 기쁜 생일」 부분

 

 

시인에게 사랑은 죽음이 죽음을 따르는 무서운 사랑이지만, 시인은 그 “치명적인 사랑”을 시작하려 한다. 기존 권력의 억압 아래 살아왔던 여성 주체는 죽음으로 죽음을 베어 그 모든 것은 부정하고 “내 뿌리”로 아름답게 다시 태어난다.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에서 시인은 사랑을 살의와 동일시한다. “고독한 이빨을 갈고 있는 살의”를 “살의, 아니 그것은 사랑.”이라 말한다. 그 사랑은 “내 모가지”를 칠 것이고, 내 모가지는 “땅바닥에 덩그렁” 떨어질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기존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 보았다. 시인은 자신의 모가지가 덩그렁 떨어지는 소리를 바로 그 모가지의 귀로 듣고자 한다.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목도하는 그 죽음과 자기 파괴의 순간은 곧 억압으로부터의 탈주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랑, 즉 자신에 대한 살의가 실현되는 순간을 직면할 때 비로소 눈을 감을 수 있다.

 

죽음과 자기파괴를 통해 해방될 수 있는 주체의 생은 필연적으로 우울과 불안을 포함하며, 슬픔과 고독으로 귀결된다. 「부질없는 물음」에서는 그러한 운명에 대해 제목 그대로 ‘부질없는 물음’을 던진다. 화자는 어째서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 알리는 데에 “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는지 묻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질문은 부질없음을 알고 있다.

 

결국 죽음으로 죽음을 베는 고통과 살의, 즉 사랑을 통해서 주체는 새롭게 탄생할 수 있다. 죽음과 사랑의 역설처럼, 여성 주체는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자신의 사랑은 고독하게 떨어야 할 수밖에 없음을 화자는 이미 안다. 그래서 “울며 절뚝 불며 절뚝” “가야지,”라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저항에의 의지를 다잡는다.

 

시인은 파괴적인 이미지와 비체로 뒤덮인 자신의 몸을 통해 모멸과 고통을 직시한다. 그 처절한 자기 인식과 부정을 통해 시인은 그것을 전복하며 새로운 곳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버림받은 자들의 노래」에서 시인은 여성 주체들을 ‘우리들’로 묶는다. 우리들은 “뼈아픈 사랑”, “단발마의 비명 같은 사랑”을 남기고 지상에서 떠날 것이다. 그곳이 “땅속”이고 “어딘가 깊은 웅덩이”, “한의 못”이라도, 그 불모의 땅이 바로 억압에서 벗어난 ‘우리들’의 땅이자 “우리들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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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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