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중대재해법'과 '정인이법'이 동시에 통과된 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글 입력 2021.01.09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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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8일, 새해가 된지 꼭 일주일이 지난 날 저녁, 국회발 속보들이 메인뉴스를 장식했다. 산재사고를 방지하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안과 아동학대를 방지하는 소위 '정인이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이었다. 얼핏 좋은 소식들처럼 들린다.

 

법안이 통과되고 반나절이 지난 현시각까지도 기사란이 소란스럽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누더기법안이 되었으며, '정인이법'은 늑장대응이라고 비판하는 기사들이 특히 눈에 띈다. 필자는 전자에는 동의하되 후자에는 동의하지 않는 바이다. 일이 터져야 제도를 바꾼다는 말,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실상 늘 그래왔던 일이다.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은 먼저 스스로 약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만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기에, 우리가 약자의 편이 될 때 세상은 그렇게 바뀌어간다. 늦었을지언정 재빠른 법안 마련은 마땅히 잘한 일이다.


그런데 생각해봐야할 것은 이번 사건이 법안의 미비 때문에 일어난 일이 맞는가 하는 것이다. 이토록 국민적 공분을 사는 일이 없었다면 법안이 없었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사회적 이슈로 불거지지 않은 일을 법이 먼저 알고 제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오히려 법 수준의 대응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위 수준에서 충분히 저지되었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고 소위 'OO'법이 마련될 때마다 어딘가 석연치 못한 기분이 든다. 자꾸만 물이 새어나오는 호스에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고 번번이 구멍만 메꾸는, 꼭 그런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개인의 도덕성이나 지역사회 혹은 경찰이나 검찰 수준에서 충분히 저지되었어야 하는 일이 그렇지 못하고 새어나와 속된 말로 '땜빵'처럼 법안이 마련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진즉에 필요했던 법안일 수 있고, 실제로 비슷한 사건을 방지할 수 있고, 이것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맞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허나 기억해야할 것은 법적 해결은 분명한 득과 실을 가진다는 것이다. 법은 '다음'을 막을 수 있는 강력한 기제가 될 수도 있지만, 눈에 보이는 선명한 결과물로서 공분을 끌어안고 그렇게 사라질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법이 제정되면 끝이라는 이야기이다. 더불어 이러한 해결방식은 법의 힘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든다. 법이 개인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게 만드는 꼴이다. 법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게 된다. 법치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법을 만드는 것도 사람, 집행하는 것도 사람, 대상이 되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법이 제정되는 것이 능사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경우는 다르다. 약자가 있고 명백히 그 약자를 짓밟으려는 권력이 있을 때 국가는 마땅히 그를 보호해야 한다. 더군다나 그 약자가 무려 생명권을 위협받는다면 국가가 최소한 살 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죽어간다. 그들이 위험한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놓인 위험을 알고도 바꾸는데에 '돈이 든다는 이유로' 방치하기 때문이다. 누가? 그 돈을 손에 쥔 자들이.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은 국민적 공분을 샀고 긴 추모행렬을 만들었음에도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부개정되었지만 책임자는 여전히 낮은 벌금형으로 처벌망을 빠져나간다. 아무리 사람이 죽고 죽어도 그들에게는 돈 몇 푼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인' 처사다.


그래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벌금의 하한선을 만들었고 경영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조항을 마련했다. 모든 노동계와 시민사회와 많은 사람들이, 경영책임자가 책임지고 사업장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모든 노동자가 안전하게 퇴근할 수 있도록, 해당 법이 제정되기를 오랫동안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작년 말, 법안은 끝끝내 다른 사안들에 '밀려' 제정되지 못했다. 그리고 21년 1월 8일, 갑작스레 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취지를 잃다 못해 법률명에 '기업'마저 빠져버린, 그야말로 '누더기'가 된 상태로 말이다. '볼드모트' 마냥 기업을 기업이라 부르지도 못하는 법안이 마땅한 조항을 담고 있을리는 물론 만무하다. '또는' 이라는 말로 경영책임자가 빠져나갈 구실을 마련해주었고 전체 사업장의 80퍼센트에 달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을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전체 사업장의 98퍼센트에 해당하는 '50인 미만 사업장'마저도 3년 동안 적용이 '유예'되었다.

 

'나중에'

 

3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정치권력은 연대를 명백히 저버렸다.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눈을 가리고, 경제권력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있는가? 그들은 누구에 의해 작동되는가?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들의 의무가 아니었던가?


무언가 분명히, 잘못 끼워맞추어져 있다.

 

매듭을 풀지 않고서 결코 바늘을 제대로 꿰어낼 수 없다.

 

 

 

강우정.jpg

 

 

[강우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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