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런 날 [사람]

글 입력 2021.01.0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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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작년과는 영 딴판인 연말과 연초, 방 창문을 열고 바깥을 구경하는 게 전부인 집고양이 같은 일상. 오늘의 최대 고민이 저녁 메뉴라는 것이 서글퍼지는 날이었다. 누구나 잃은 일상이라는 생각에, 적어도 내 생계에는 문제가 없다는 나쁜 마음도 쉽사리 위로가 되질 않았다. 끼고 살던 책들은 지루해졌고, 자주 보던 넷플릭스 콘텐츠들은 진부해졌다. 무언가 필요했다.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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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미적거리다 글이라도 쓰려 노트북을 열었다. 어차피 다시 쓸 건데, 하고 늘여놨던 것들이 새삼스레 거슬렸다. 글을 쓰기 전이나 과제를 하기 전이면 다들 그렇지 않나? 핸드크림, 바디크림, 렌즈 통, 식염수, 무선 이어폰, 헤어롤, 언젠가 선물 받은 커다란 초록색 양주병. 립밤, 각종 충전 선들과 어쩌다 한 번 들여다보는 예전 일기장. 채 켜지지도 않은 노트북을 다시 닫았다. 변화가 필요해, 뭘 좀 바꾸고 싶어.

 

 
“민영아 네가 너무 따뜻한 사람이라서 추위를 많이 타나 봐. 그런 것처럼, 많은 감정을 느낀다는 건 단점이 아닐 거야. 적어도 난 너한테 너무 많은 온기를 받아왔는걸.”
 


얼굴을 마주하며 얘기를 나눈 지 한참이 더 된 친구의 편지였다. 고양이가 그려진 엽서에 빼곡히 들어찬 애정의 글씨들이었다. 그 애는 단번에 죽 써내렸을 텐데, 읽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까지 가져가 읽곤 했는데, 이렇게 아무렇게나 뒀다니. ‘자주 볼 것’을 ‘아무렇게나’ 두는 게으름이란.


그리고 ‘딸내미 북’이 있었다. 무뚝뚝한 이 씨 가족을 바꿔 보고자 ‘마미 북’과 ‘대디 북’을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그마저 새것인 상태로 보관하셨다. 언젠가 부모님이 부재하게 되면 읽고 싶으니, 그들에 대한 문답을 채워 달라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도 이게 그리 어려운 일이냐며 매번 투닥거리다가, ‘그럼 네가 해 봐!’하는 말에 스스로 딸내미 북을 만든 것이다. 노트 표지에 대차게 이름표만 붙였지, 두어 달 전에 만든 딸내미 북도 새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게 이런 말일까.


책상 정리를 한 김에 책장 정리를 하자고 두 팔을 걷어붙였다. 이쯤되면 글을 쓰려고 앉은 게 아니라 청소를 하려고 앉았던 게 아닐까? 그 사이에서, 5년이 지난 수능 성적표가 툭 튀어나왔다. 수험 표와 함께. 기념품이라면 기념품인 종이를 왜 책들 사이에 숨겨뒀는진 모르겠다만, 조금 그립고 아주 조금 더 애틋하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대학교 하나만 바라보며 열심히던 그때 당시의 스스로가, 묘하게 기특하고 대견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일단 출발할 줄도 알았었구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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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를 하며 환기를 조금 시켰더니 추위에 잠이 싹 달아났다. 나쁜 기운과 생각들도 먼지와 함께 바깥으로 빨려나가는 듯했다. 뜬금없이 운동을 하고 싶었다. 다니던 필라테스 센터는 문을 닫았으니, 그럼 집 근처 산에 가야 한다. 아무도 잠옷인 것을 모를 거라며, 잠옷 위에 롱패딩을 두르고 모자를 썼다.


운동보다는 산책에 가까웠다. 적어도 필라테스를 할 땐 곡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이렇게 완만한 경사를 오를 땐 콧노래가 나오니까. 닫혀버린 축구장 근처 벤치에 앉았다. 뭐라도 사서 올라올걸, 핫초코가 먹고 싶은데? 방 안에서 하던 생각은 이미 뒷전이었다. 추위와, 어디가 정상쯤인지ㅡ아주 작은 산이었지만ㅡ, 핫초코를 맛있게 하는 카페가 어디인지, 겨울 운동복을 어디서 살지. 생산적인 생각들도 아니었다만 비생산적인 것들도 아니었다. 몸 안의 공기를 다 빼낸 후 새로운, 아주 차고 맑은 것들로 뒤바꿨으니.


영화. 집에 가면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멀리서 고등학교 동창이 마구 뛰어가는 걸 봤다. 바쁘게 가는 걸 붙잡을 만큼의 친밀도는 없었기에 눈으로만 좇았다. 목청을 한 번 높였으면 희미해지던 인연을 다시 붙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그러지 않았다.


우연이 필연으로 바뀌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스물한 살, 대학교 이학년 이학기. 나는 영화사 수업을 들었다. 나는 한 번 지루하다고 느낀 영화엔 쉽게 집중할 수 없는데, 교수님의 제스처와 눈빛 하나하나가 그것들을 살아나게 했다. 남몰래 그를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강단에 서서 모든 학생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출까, 어떻게 자신의 수업 도중 조는 학생을 보고도 씩 웃고 말 수 있을까. 강의 시작 전 우연한 스몰 톡을 계기로 그와 친해졌다. 서슴없이 밥을 사 주셨고, 내가 본 영화들에 대해 진심으로 궁금해하셨다. 심지어, 나의 개인 프로젝트를 도우러 주말을 반납하셨다. 나는 공강을 반납하고 교수님의 타 강의 시험 감독을 맡았다.


멍하니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떠올리다 보니 이젠 손에 감각이 없어질 것 같았다. 나이키 런을 다시 켜야 하는데... 얼어버린 몸을 데우겠다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달리는 이상한 꼴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방과 거실은 내 덕분에 자주 환기된다. 원래 있던 것들을 내보내고 새로운 공기를 맡는다. 거창한 새해 다짐들 마지막 즈음에, ‘환기’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내가 머무르는 공간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그런 기회를 주는 것. 얼굴을 모두 가리고 달려야 하지만, 이전보단 꽤나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다. ‘일단 움직여야 해요’라는 아이유의 우울 극복 조언도, 다른 말로 하면 ‘환기’가 아닐까.

 

 

[이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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