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안녕, 나의 서른

방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간 시간
글 입력 2021.01.01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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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31일에는 20대를 되돌아봤다. 그렇다면 이번 31일은 30대의 시작을 되짚어볼 차례다.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코로나 직격타를 맞은 한 해로 기억될 것 같다. 나는 거기에 이런저런 안 좋은 일까지 더해져서 2020년 없는 셈치고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계획한 대로 서른의 시작을 되짚어본다.

 

*


서른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연봉이 올랐기 때문이다. 수도권 4년제 졸에게 주어지는 평균적인 중소기업 사무직 초봉을 받으면서 입사했는데 첫해 업무평가가 괜찮게 나와서 연봉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상승했다. 남의 이야기 같던 직장인 몸값 올리기가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새삼스레 내가 직장인이란 걸 실감하기도 했다. 숫자만 조금 달라졌을 뿐, 월급날만 되면 카드 선결제와 적금으로 금방 허전해진 잔고를 마주하는 건 똑같았지만 말이다.


사실 회사를 별생각 없이 다니고 있었다. 싫은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지만, 팀 분위기 좋고 업무환경 나쁘지 않아서 여기 몇 년 다니면서 경력 쌓이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듯 나도 몸값 올려서 이직하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다. 회사 다니는 법 A to Z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마다 다른 환경에 연봉은 조심스러운 화제라서 주변 사람들과 공감할 만한 이야기만 나눴으니까 더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딱히 인생계획이 없어서... 돈 더 벌면 좋고 아니면 서글프고. 뭐 그런 정도? 중고신입으로 입사한 거라 구직하면서 초봉만 신경 썼고, 연봉 협상 시즌에 쥐꼬리만 한 연봉인상률 통보받았단 얘기만 들어서 내 몸값에 너무 관심이 없었다. 나도 그런대로 값어치를 하는 톱니바퀴1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서른 살 1월의 월급날.

 

*


간이 작아서 큰 소비를 하지 못하는 편이다. 어렸을 땐 돈 벌기 시작하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살 줄 알았는데 현실은 편의점과 카페에서 돈 자잘하게 돈 쓰다가 카드 명세서 보고 놀라기. 그래도 용돈 받아 쓸 때보다, 아르바이트로 용돈 벌이했을 때보다 씀씀이가 커졌다. 적금과 적금과 적금으로 곳간을 조금씩 채우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의외로 돈이 많은 걸 해결해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편의점을 끊고 다른 데에 돈을 썼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난감을 다시 찾는 키덜트족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좋아했지만 돈 때문에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게 눈에 들어왔다. 그걸 좋아했던 시절의 내가 그리운 마음이 무엇보다 컸고,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마음이 나를 부추겼다. 그래서 돈으로 추억을 샀다. 그때의 향수를 얹어서.

 

지금의 나에겐 쓸모가 없어져서 수집만 하다 끝날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정말로 하고 싶었으니까. 과거의 내가 하지 못한 걸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다는 건, 지금 내가 얻지 못해서 아쉬운 걸 미래의 내가 해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들이 그렇게까지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


그때는 몰랐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잠시간의 마스크 공급 부족만 야기하고는 금방 잡힐 줄 알았다. 생전 처음으로 배급받듯 줄 서서 기다려서 마스크를 사던 나날들이 추억이 될 줄 알았는데 마스크가 생활화되었다. 밖에 나왔는데 유난히 상쾌하다 싶으면 마스크를 안 하고 나온 거라는 인터넷 유머에 공감하는 일상까지는 그래도 납득할 수 있었다.


여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마라 쫌’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또 늘어나고, 잠잠해지나 싶으면 다시 폭증. 이젠 진짜 줄어들겠지 하는 순간 찾아오는 역대급 확진자 추이. 일상을 코로나에 빼앗겼다.


하려던 게 많았다. 해외여행 가려고 작년에 연차를 아껴서 이월했다. 코로나로 해외는 글렀구나 싶어서 국내 여행지를 알아봤다. 가을에 날 선선하면 한적한 데 가서 쉬려고. 근데 택도 없는 소리가 되었다. 여행이 안 된다면 평일 낮에 카페에 가서 여유 부리고 싶었다. 그러나 연차는 방구석에서 소진되었다. 일 년에 한 번은 가능할 거 같았던 해외여행은 국내 여행으로 바뀌고, 국내 여행은 잠시간의 외출로 바뀌고, 목적 없는 외출은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서른은 방구석에 머물러 있다가 떠나갔다.

 

*


이렇게나 시시한 서른이라니. 기껏 30대가 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했는데 일상은 막혀있고 현실은 녹록지 않아 추억여행하면서 과거의 나를 달래고 있다. 미래지향적이라든가, 향상심이라든가, 뭔가 다른 거... 역시나 없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듯 어제의 스물아홉과 오늘의 서른이 뭐 그렇게 다르겠냐마는.


그래도 다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이젠 학년도, 개학식도, 개강도 없어져서 나 혼자 달릴 트랙 위에 서 있으니까. 내 손으로 시작점 그어두고 출발해야 하니까. 서른에 30대를 제대로 시작해보고 싶었는데 연습게임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직 30대는 9년이나 더 남았으니까 내년엔 애써보는 시간을 가져서 만회해야지.


안녕, 서툴렀던 나의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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