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욕망, 상처, 결여, 사랑의 기록 - 빅피쉬 [영화]

글 입력 2020.12.30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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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윌러스의 『큰 물고기』를 원작으로 하는 팀 버튼 감독의 행복한 판타지. 아름다운 가족 영화. 믿을수록 행복해지는 이야기. 많은 사람들이 영화 『빅피쉬』를 설명할 때 붙이는 말이다.

 

그렇다. 『빅피쉬』는 환상이 가득한 이야기 속에서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말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속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면, 욕망의 이야기, 상처의 이야기, 결여의 이야기, 사랑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욕망, 상처, 결여, 사랑은 모두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한번쯤은 꼭 만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의 인생은 상처와 결여의 기록이며, 욕망과 사랑은 인생을 지속하게 만드는 미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상처와 결여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욕망과 사랑으로 인생을 살아가는가?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함의와 힘은 무엇인가?

 

 

 

물, 사람을 살게 하는 것


 

영화 『빅피쉬』는 두 갈래의 큰 핵심 스토리로 전개된다. 에드워드의 인생과, 에드워드와 윌의 관계가 바로 그 두 갈래다. 먼저 에드워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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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평생 목이 말랐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빅피쉬』 中 에드워드의 대사)

 

 

에드워드는 평생 물을 갈망했다. 어머니의 뱃속 양수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강으로 돌아가 죽는 순간까지 그는 목말라했다. 빈번하게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고, 수없이 강에 뛰어들었으며, 이런 것이 허용되지 않을 때에는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가기라도 했다. 왜 그는 하필 물을 갈망했으며, 그에게 물은 어떤 의미인 것인가?

 

에드워드 블룸, 그의 이름을 생각해보자. 그의 이름에서 ‘Bloom’은 ‘꽃이 피다’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이름부터, 그가 왜 평생 물을 갈망했는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꽃이 피어나려면 물을 줘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피어나기 위해서도 물이 필요하다. 여기서 물이 명확하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사리 정의를 내릴 수는 없으나, 사람마다 각자 나름의 물을 갈망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일 것이다.

 

에드워드가 평생 갈망하는 물은 라캉이 제시한 상실된 대상이며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타자인 ‘물(das Ding)’의 개념과도 연결된다. 라캉이 말하는 물은 주체가 욕망하는 궁극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소유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망각할 수도 없다. 에드워드는 평생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물을 갈망하지만, 물을 소유한 적은 없으며, 죽는 순간까지 물에 대한 욕망을 망각하지 못한다. 에드워드의 긴 삶의 여정은 물을 향한 것이었고, 그 여정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물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비단 에드워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물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물이 뜻하는 근원적인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물을 쟁취할 수도 없지만, 우리는 그 물을 욕망하기에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 그 숭고한 대상을 찾겠다는 욕망으로 인생이란 여정은 계속된다.

 

 

 

이야기, 상처의 기록


 

에드워드의 모험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에드워드와 윌의 관계다. 에드워드의 인생에 윌이 자리 잡고, 윌의 인생에 에드워드가 자리 잡는 그 순간부터 둘은 서로에 대한 각자의 상처를 마주한다.

 

윌은 예정보다 일주일 일찍 태어났고, 에드워드는 윌이 태어나는 그 순간에 곁에서 함께하지 못했다. 물론 분만실에 남편이 함께 들어가지 못하던 시절이므로, 그가 일을 때려치우고 병원에 와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윌의 탄생의 순간은 함께하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 깊게 사로잡히게 한다. 이러한 경험과 감정은 에드워드 자신에게도 상처가 된다. 에드워드의 인생 이야기의 본질은 자신의 상처에 대한 기록이었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 상처의 기록을 사랑으로 포장해 윌에게 전한다. 바로 그것이, 윌이 허풍 혹은 환상적인 거짓말쯤으로 이해하는 에드워드의 이야기이다. 아들을 향한 사랑으로 포장한 에드워드의 이야기들이 윌에게는 그저 아버지의 존재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이야기가 마냥, 그리고 오래도록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바쁘고 집을 자주 비우는 아버지,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이 모든 것이 윌에게는 상처다.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이 더 필요한 윌에게 그 대신으로 던져진 에드워드의 이야기는 또 다른 상처로 남아 의심과 적대감을 남길 뿐이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거짓과 허풍일 뿐이고, 윌은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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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의 이야기는 그의 상처의 기록이자, 윌의 상처의 기록이기도 하다. 완벽히 치유되지 못한 둘의 상처가 둘의 관계에 갈등을 만드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상처가 둘을 연결하고 있다. 상처를 치유할 방법은 결국 서로를 들여다보는 것뿐이기에, 에드워드와 윌은 점차 진정한 소통을 시도한다.

 

 

 

결여, 한계에서 전제로


 

진정한 소통은 무엇이고, 진정한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결여에 있다. 우리는 타인을 떠올리거나 설명할 때, ‘성별’, ‘나이’, ‘직업’, ‘고향’, ‘학력’ 등의 상징계적 질서를 활용한다.

 

하지만 그 항목을 무한에 가깝게 늘린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사람을 정의할 수는 없다. 상징계로는 미처 다 포착할 수 없는 무의식적 진실의 세계인 실재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상징계적 질서로 타인을 정의하려 하고, 결국 그 정의와 실재의 차이에서 결여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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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를 잘 아는 이방인 같았다.”

(빅피쉬 中 윌의 대사)

 

 

에드워드와 윌 역시 그랬다. 각자의 상징계적 질서로 서로를 정의했으나, 그것은 그 사람의 실재가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발생한 결여는 두 사람이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했다. 서로의 상상적 시선에서 파생한 결여를 진실된 관계 맺기의 한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여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바꾸면, 결여는 사랑을 낳을 수 있다. 서로의 결여를 관계의 한계가 아닌, 관계의 전제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결여를 바라보는 순간 서로는 서로의 실재에 한 발짝 더 다가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진실된 소통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으로 결여와 결여가 만났을 때, 그것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상대를 나의 질서로 바라보지 않고, 상대의 결여와 나의 결여를 인정하며, 진실된 소통을 이어갈 때, 갈등은 해결되고 사랑은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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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피쉬』라는 환상동화의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의 삶으로 눈을 돌려본다. 나의 나이테에 새겨진 상처의 기록은 무엇인지 들춰본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욕망은 무엇이고, 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고 있으며, 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 행위는, 스크린 속에서 펼쳐진 판타지는 그 어떤 다큐보다도 우리의 삶을 잘 반영하고 있었으며, 우리의 삶을 지속하는 궁극적인 무언가를 마주하게 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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