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지만 소방서에서 일했었다(나는 의무소방원이었다). 소방서에 있으면 몸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들도 자주 만난다. 하루는 한 남자를 다른 도시의 정신건강병원으로 이송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행동 장애, 불안 장애 등으로 몇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지난번 병원에서는 도망을 쳤다고 했다. 시끄럽다는 이유로 이웃집에 찾아가 망치를 휘두른 전력도 있었다.
이런 요주의 인물을 이송하는 일에는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다. 안전한 이송을 위해 경찰 두 명이 우리와 동행했다. 그중 하나는 경찰차를 타고 우리를 따라오고, 다른 하나는 우리와 함께 구급차에 탑승해 만일을 대비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구급차 안에서는 긴장이 감돌았다.
반면 가는 동안 남자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농담을 던졌다. 그러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 농담들이 빛을 발할 리가 없다. 그가 던지는 농담은 족족 생기를 잃고 시들었다. 결국 시무룩해진 그가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형님은 제가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봐요.’
이렇게 습관적으로 소방서에 전화를 걸어 죽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자살 중독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늦은 밤, 혹은 새벽에 소방서로 불쑥 전화를 걸어 자살하겠다는 예고장을 날린다. 소방관은 그런 그들을 구하고자 부랴부랴 출동한다. 하지만 자살 중독자들의 예고는 대부분 말로만 그친다. 그래서 이들은 소방관들에게 골칫거리가 된다. 별거 아닌 출동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애매한 사안. 나 역시도 그런 그들을 많이 귀찮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정맥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돌아가는 길에 출동 지령이 다급하게 단말기로 날아들었다. 심정지 환자였다. 하필이면 우리가 다른 출동을 나가 있던 사이에 관내에서 중증 환자가 발생한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니 다른 관할에서 지원 온 구급대원들이 이미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 서둘러 환자를 이송할 준비를 했다. 환자를 들것에 싣고 복도를 달렸다. 그런 와중에도 환자의 가슴팍을 꾹꾹 눌러댔다. 허나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나는 그가 이미 죽었다는 걸 직감했다. 나는 환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우리가 만난 자살 중독자였다.
씁쓸한 결말을 맞이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몸이 아픈 사람들에겐 응급처지도 해주고, 병원으로도 데려다준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기억들을 되짚어 보는데 경계하거나 귀찮아했던 것 말고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똑같이 아픈 사람이고, 똑같이 도움이 필요한 환자인데 대관절 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저자 안병은이 정신과 의사로서 꿈꾸는 세상을 그린 에세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혐오를 드러내며, 이를 통해 정신질환자가 실제 갇혀 있는 곳은 병원이 아닌 우리의 편견이라는 사실을 꼬집는다. 동시에 수용 위주의 정책이 실패한 역사를 이야기하며 환자의 결정권을 무시한 강압적이고 광폭한 치료가 남긴 상흔을 들여다본다.
한 개인이 특정 질환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건 사회가 그 병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18쪽
그렇다면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 안병은은 그 방법으로 지역사회 중심의 치료를 강조한다. 정신질환자를 격리 수용하여 그들의 사회적 자리를 지우는 대신에, 그들이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돌봄’이야말로 진정한 치료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계했다. 그 남자를. 왜? 모르겠다. 어쩌면 그가 정신질환자여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니다. 애초에 이유가 그거 밖에 없다. 이상한 사람이니까, 미친 사람이니까 언제든 돌변해서 우리에게 해를 가할지도 모른다고 나 스스로 이미 단정해버린 것이다.
한편 내가 만난 두 번째 남자는 어떠한가. 구급대원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정말로 죽고 싶은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남자는 정말로 죽어버렸다. 보통 대부분의 자살 환자들은 실제로 일을 벌이기 전에 몇 가지 징후들을 보인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가 우리에게 걸었던 ‘나 죽겠소’하는 전화는 그런 징후들 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죽고 싶다.’ 이 말을 하는 건 쉽지만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어렵다. 그건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려울 만큼의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우리에게 걸었던 전화는 정말로 내가 죽어버리겠다는 경고성 전화가 아니었다. 그건 너무 무서우니까, 두려우니까 제발 좀 자기를 구해달라는 SOS 요청이었다.
망상이나 환청을 숨기지 않아도 되며 중증 정신질환자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는 세상. 자신의 아픔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 마음껏 마음을 아파할 수 있는 세상. 나는 그런 세상을 위한 혁명을 꿈꾼다. 이 책은 나의 혁명에 관한 책이다.42쪽
마음이 아픈 사람들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나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도와달라고 소리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소리를 계속 일상의 소음으로 치부한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은 손을 놓아버리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된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한발짝 나아가야 힌다. 단절된 구원과 위로를 우리 안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일선의 의사들과 소방관, 경찰관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그들을 끌어올려 다시 사회의 한 자리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들의 가족들은 네 잘못이 아니라며 용기를 복돋아야 하고, 이웃과 친구들은 그들이 다시 돌아온 일상에 무사히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나아가 공동체는 그들이 처한 비극적인 상황이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건 아닌지 고민하며 함께 해결하고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나친 호들갑이 아니냐는 말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 한 생명을 구한다는 건, 한 인간의 자리를 찾는다는 건 원래 그런 일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때 공동체는 개인을 구석해서도, 규정해서도 안 된다. 공동체 안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자기 안에 공동체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인위적으로 형성된 치료 공동체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가 일종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마음이 아픈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배워야 한다. 마음이 아픈사람들을 위해성급히무엇인가를 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무엇을 해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 옆에 함께 머무는 마음이다.
302쪽
- 미친 게 아니라 아픈 겁니다 -
지은이: 안병은
출판사: 한길사
분야
에세이
규격
120*188
쪽 수: 360쪽
발행일
2020년 11월 19일
정가: 17,000원
ISBN
978-89-356-6345-3 (03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