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1983년 8월 25일 [도서]

글 입력 2020.12.22 05:0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꿈’이라는 개념을 몰랐을 무렵부터 꿈의 힘을 믿었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어린 시절 본방 사수하던 TV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공포를 다루었던 에피소드를 보았을 때였다. 주인공의 꿈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했다고 생각했더니 다시 꿈에서 깨고, 그러나 벗어나려고 해도 사실 전부 꿈속이었던 내용으로 기억한다. 치열했던 사건들이 결국 자신만이 아는 것이며, 벗어난 줄 알았으나 결국 그대로라니, 끔찍하지 않은가? 심지어 꿈에서 깨는 즉시 대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사실, 꿈은 전혀 알 수 없다. 너무 실감나서 현실보다 더 잔혹할 때도 있고, 혹은 너무 터무니없어서 ‘개꿈이네.’라는 말로 정리해버릴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꿈 자체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며 그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 상황 전부 역시 그 모든 바탕에는 ‘나’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83년 8월 25일」


 

「1983년 8월 25일」의 ‘나’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어느 호텔 19호실에서 10년 후의 자신을 만난다. 무려 자살을 결심한 자신을 말이다. 사실 그들의 만남은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나’가 호텔에 들어가서부터 꿈이 시작된 것이다. 호텔 지배인은 주인공을 보고는 주인공을 닮은 남자를 보았다며, 그는 19호실에 있다고 안내한다. 그가 방문을 열자마자 본 것은, 나이가 더 든 자신의 모습이다.

 

 

“우리는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일세. 하지만 꿈속에서라면 이상할 것이라곤 조금도 없는 셈이지.”

 

 

이 소설처럼, 우리는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언제나 궁금해 한다. 현실의 자신은 절대 미리 알 수 없는, 몇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어쩌면 미래에는 현실보다는 더 나아졌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1983년 8월 25일」에서는 자신의 미래 모습을 직접적으로 마주한다. 그는 더 없는 명성을 얻었을까. 혹은 부를 얻었을까. 그러나 그런 은근한 기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미래의 주인공은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꿈이라고.


독자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미래의 자신을 보자마자, 마지막을 언급한다니?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우리는 쉽게 납득한다. 주인공은 ‘내가 그였으므로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라고. 심지어 아무리 극적인 상황이어도 누구나 셰익스피어가 되어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기는 어렵다고.

 

타인이자 자신인 존재를 마주한 주인공은 쉽게 상대를 이해한다. 심지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태연하게 추측하기까지 한다.


 

 

꿈과 꿈의 만남


 

[크기변환]narrative-794978_960_720.jpg

 

 

꿈은 그자체로 힘이 있다. 우리가 ‘미래의 자신과 만난다.’라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상황을 쉽게 납득하는 것도 꿈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꿈에서 어떤 숫자를 보았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했더니 로또에 당첨되었다는 기사를 알고 있다. 혹은 꿈에 저승사자가 나왔고 실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어느 하나 정확한 근거가 없지만,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 ‘꿈’ 때문이다. 꿈에서 우리는 무수히 확장하는 이야기를 경험한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못할 일이 ‘꿈’을 통해 일어난다. 소설 속의 ‘나’는 19호실에 들어가면서, 미래의 자신은 죽어가는 도중에 꿈속에 있다. 심지어 꿈속의 공간은 이미 수십 년 전에 철거된 건물이었다. 그들은 꿈을 꾸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국 꿈에서조차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속이는 행위를 보여주며 그들 모두가 꿈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아마 이 둘 모두 꿈에서 깨면 대부분의 꿈속 기억을 잃을 것이다. 지독히도 생생한 기억이었다며 읊조리다가도 하루가 지나면 잊거나, 애초에 ‘무슨 개꿈을 꾼 것 같은데…….’라고 마무리 지을 것이다.

 

‘꿈’은 「1983년 8월 25일」에서 이야기의 시작이자, 현재이자 미래이다. ‘현재’의 주인공이 호텔에 들어오면서, ‘미래’의 나 또한 죽어가면서 같은 꿈을 꾸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고 말한다. 이미 이 꿈에서부터 이야기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미래의 나에게서의 정보를 듣고 이 이야기를 쓰지 않을 거라 다짐하지만, 이미 이 꿈은 한낱 희미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며 결국 책이 나온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이 아닌, 오로지 환상적인 이야기를 구상했다고 착각할 것이라고. 결국 주인공은 이 상황을 부정하고,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결말은 정해져있다. 보르헤스의 「1983년 8월 25일」이라는 소설이 탄생한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크기변환]once-upon-a-time-719174_960_720.jpg

 

 

왜 작가는 꿈을 통해 이 소설을 썼을까. 꿈은 환상적이다. 어떤 터무니없는 이야기어도 꿈을 방패로 개연성을 만들 수 있다. 꿈을 통한 이야기의 전개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한국의 고전 소설 <구운몽>에서는 여덟 선녀와 어울리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모든 것은 꿈이었다. 결국 모든 것은 덧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덧없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현실보다 더 정교하다. 독자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그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지켜본 입장이다. 적어도 독자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진실이 된다.

 

 

“저는 그 책을 쓰지 않겠어요.”


“아니야. 자네는 그 책을 쓸 거야. 지금 내가 한 말들은 한낱 희미한 꿈의 기억에 지나지 않게 될 걸세.”

 

 

「1983년 8월 25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에서 미래의 자신과 만나는 주인공. 주인공은 잠에서 깨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이 소설 속 인물간의 대화가 한낱 개꿈처럼 읽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만은 이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다. 주인공은 분명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써낼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 집필본을 우리는 읽고 있다. 꿈속의 대화는 결국 현실이 되고 우리는 꿈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에서 현실을 만난다.

 

 

[이승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