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ㅡ가, 우리ㅡ가 만든 여자들 [도서]

글 입력 2020.12.1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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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에서 복싱 선수로, 그러다 소설가의 삶을 택했다.

 

작가 소개란부터 매력적이었다. 특목고에서 수학을 가르쳤지만 ‘매일 불행한 눈동자들을 수없이 마주해야 했다’라니. 글에 표현된 대로라면 신붓감 1위인 교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나는 작가 소개와 작가의 말을 모두 읽은 후 책의 본론에 들어서는 습관이 있다. 어쩜, 작가의 말의 마지막 문장까지 마음을 울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화대교를 반복해 걸으면서도 끝내 뛰어내릴 용기는 내지 못한 그 시절의 나에게 감사합니다.”
 


죽지 않은 과거의 나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것도 나의 마지막 인상이라 할 수도 있는 ‘작가의 말’ 속에.

 

잔뜩 기대하며 열세 가지의 단편 중 첫 번째부터 차근차근 읽어 내렸다. 표현력은 섬세하고 현실적이었으나, 하나의 단편이 끝날 때마다 의미와 여운을 곱씹느라 그것들을 소화하는 데에만 한 세월이었다.

 

판타지 같기도 한데 수필의 향이 베어 있었고, 픽션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그 현실감에 빠져 제대로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사랑, 사건, 이주민 노동자, 성소수자, 내부고발, 다양한 종류의 폭력들. 상당히 명쾌하게 우리의 아픈 지점을 들쑤신다. 울면서 웃는다,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엔드 오브 더 로드 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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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줌마가 이민을 갈 때까지는 그랬다. 그 후로 어쩐지 행복이란 놈은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만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 서로 이별해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도망쳐야 했던 이유, 제 발로 떠난 한국이지만 제 손으로 벌인 일은 아니었다. 딸의 입장에서 엄마에 대한 연민과 아줌마에 대한 원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가, 순식간에 주인공은 아줌마가 된다. 행복을 앗아간 것은 아줌마가 아니었다. 이 전개에서도, 작가는 폭력에 대해 면밀한 표현을 제지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겪어오며, 필요 이상의 ‘디테일’들을 머릿속에 세뇌당해 왔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피해자에 대한 곡선의 배려가 느껴졌다.


사랑. 나는 늘 모른다고 애써 무시해 왔던 감정이며 과정이었다. 하지만 ‘엔드 오브 더 로드 웨이’와 ‘회송’을 읽다 보면, 일상적이고 어딘가 간지러워 못 견디는 사랑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물론 이후 주인공의 상황에 힘을 싣는 역할을 해 주기도 하지만, 이 책의 기반이 서슴없이 애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겐 중요했다. 누군가에겐 한순간의 실수, 혹은 ‘홧김에’로 치부되곤 하는 폭력들이 맞은편의 누군가에겐 인생을 송두리째 갈아버리곤 한다.

 

직면해야 할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도망쳐야 할까. 적어도 우린 변화하고 있다. 변화를 모르겠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리나, 찡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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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을 하면 그 늙은 할멈, 그 사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떡 앉아서 리나 왔네, 볼에 살이 아주 그냥 오동포동하게 오른 게 시어머니 반찬이 맛있나 보지, 엉덩이가 아주 그냥 씰룩씰룩한 게 남편이 잘해 주나 벼, 하고 희희 웃더래. 반찬을 모두 자기가 한다는 거나, 어젯밤 그 엉덩이가 감당해야 했던 일 같은 것들이 아, 그냥 내가 꾼 개꿈이었나 싶기까지 하고, 그랬다는군.”
 


찡쪽. 작은 도마뱀. 처음엔 ‘이 귀여운 생명체는 뭐야!’라고 생각했다. 글에 표현된 것들이 그랬다. 본인 앞에 쭈그려 앉은 사람에게 언제까지 똥 싸는 자세로 있을 거야? 하고 묻는다든지, 당신의 구멍을 통해 밀입국했다는 당돌함이라든지. 이야기 중반부 즈음부터 인상이 박박 써졌다. 내가, 들어온 이야기들과 다른 게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기까지 했다.


한 이 년 전에, 나는 다문화 연구원에서 상담을 진행한 녹취 자료들을 텍스트로 변환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작 두 건이었다. 돈이 얼마 안 된다고 툴툴거리며 시작했지만, 그 목소리들을 들으며 밤을 새웠다.

 

아직 어눌한 말씨와 서투른 한국어로도 그들의 감정이 낱낱이 드러났다. 억울하고, 외롭고, 서럽고, 그리운 감정들. 한국인 남편과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살아가며 고향에도 도움이 될 줄 알았다는 한 여성은, 밤이면 남편의 술 주정을 걱정하고 아침이면 남편의 출근을 애타게 기다렸다. 2교대 근무인데 남편이 술에 절어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자라며 남편이 가게에 출근하는 날짜는 점점 줄어들었고, 한국어도 어눌한 아내를 하루 스무 시간 방치했다. 덤덤히 웃으며 시작한 대화는 끕, 하고 여태껏 눌러왔던 울음을 터뜨리는 것으로 끝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지네 나라에 돈 갖다 주려고, 다 알고 팔려온 거 아니야?’라는 말을 던지고 싶다면, 프라이팬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길 바란다.

 



지구를 기울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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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정말 처음 봐! 우리가 같이 해낸 거야, 그치! 외치며 고개를 돌려 아이를 봤을 때, 아이의 뭉개진 볼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재인의 시간은 그 사거리에 움푹 고여 흐를 수 없게 되었고 나의 시간만이 유속을 가진다.”

 


두 명의 화자가 있다. 애인을 잃은 남자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집의 이웃 아이. 폭력은 늘 가까이에 있다. 어떠한 종류의 폭력이든, 화살이 나를 향하는 순간 맞설 방도를 찾긴 힘들다. 굉장히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적인,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한 종류의 테러를 마주한 것 같았다. 나에겐 신 같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었다면?


얼마 전, 아빠의 오래된 지인이 무면허 음주운전으로 이른바 감방에 들어갔다고 했다. ‘왜?’ 내 첫마디는 그거였다. 분명 내가 어릴 적 하하 호호 웃으며 함께 소풍을 가고, 값비싼 옷을 사 주고, 새로운 여자친구에게 전 여자친구의 이름은 말하지 말아 달라며 윙크를 하던 넉살 좋은 아빠의 후배였다. ‘무면허 음주운전이라니까. 나라에서 고소한 거야.’ ‘그러니까... 그 삼촌이 왜?’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기준에선 ‘그런 짓을 할 사람’과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사람’, 딱 두 가지가 존재했기 때문일까.

 

락 잔에 부어댄 소주를 빙빙 돌리던 아빠가 물었다. 너는 몰랐지. 한참 동안 머리가 띵했다. 얼마 전 뉴스에, 술에 절어버릴 정도로 취한 남자가 음주운전을 말리려 뛰쳐나온 자신의 부모를 치었다는 사건을 보고 우리 가족은 침을 튀겨가며 욕을 했었다. 그런데, 그 삼촌이 왜?


이 책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리고 아주 먼 이야기인 것 같지만, 고개만 돌렸다면 볼 수 있었을 그늘의 실화들이 가득하다. 일부러 태국 도마뱀을 끌어들여 ‘썰’을 풀게 하는 것도, 말하는 라벤더도, 직접 만들어낸 여자들로 복수를 하는 서사도, 지나친 현실감을 오히려 코앞에서 마주하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사건과 현상이 생기면 원인을 찾는다. 남자는 ‘왜’ 행했으며 여자는 ‘왜’ 당했으며, 그녀들은 ‘왜’ 그곳으로 향했는가? 열세 편의 단편들은 그 ‘왜’를 던진다. 마구마구 던진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야기들을 우린 ‘왜’ 직면해야 하는지, 그것에 대해서는 각자의 사색이 담겨야 할 것 같다.

 

나는 단순히 생각하기로 했다. 이런 것들이 만연하니까.

 

 

[이민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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