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도서]

델핀 드 비강 - 충실한 마음 (2019, 레모)
글 입력 2020.12.1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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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악몽을 꿨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마음이 합쳐져 날 몰아붙이는 꿈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생각을 하면 몸 한구석이 뻐근하게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어떤 지난 시간은 지독한 얼룩 같다. 문제는 그 얼룩진 마음을 새 걸로 바꿔버리거나 세탁할 수 없다는 사실.

 

얼룩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마음 앞에서 우린 어떤 충실함을 가질 수 있을까.

 

 

 

충실한 마음


충실한 마음.jpg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은 네 명의 주인공 테오, 마티스, 세실, 엘렌 각자의 시점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서로의 이야기에 얽혀있는 이들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각자의 ‘충실함’에 대해 생각한다.

 

이 충실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작가는 권두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각각의 인물은 의식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스스로에게 충실함을 묻습니다. (...) 충실함은 우리는 만들고, 우리를 구성하며, 우리가 지키려 노력하는 가치가 됩니다. 그러나 때로는 충실함은 우리를 가두고, 우리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테오의 침묵, 충실함이라는 굴레



이혼한 부모의 집을 일주일마다 오가는 테오는 아빠의 피폐해져가는 생활을 지속적으로 목격하지만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빠의 형편을 학교나 친구(마티스)의 엄마(세실), 그리고 자신의 엄마가 알면 아빠가 자신에 대한 양육권을 모두 넘겨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테오는 단지 아빠의 양육권 때문에 이를 함구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아빠와 엄마라는 두 세계에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행위인 ‘침묵’을 그 나름대로 충실하게 해낸 것이며, 여기에는 심지어 어떤 종류의 불안정한 애틋함마저 있다.


문제는 테오가 지닌 충실함의 기저에 있는 의존성인데, 그에게 의존의 대상은 술이다.

 

 
“알코올성 혼수상태.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고 한다. 그는 이 단어들을 좋아한다. 그 소리를, 약속을 좋아한다. 그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이 사라지는 순간, 어김없이 지워지는 순간이라는 약속.”
 

 

 

엘렌의 응시,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13살이 채 되지 않은 테오의 흔들리는 대지를 선생 엘렌이 주시하고 있다.

 

엘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내면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시도한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 없이 테오에게 개인적인 것들을 끄집어내게 할 수는 없기에 엘렌은 전전긍긍하면서도 계속해서 그의 감추어진 부분을 목격하려고 한다.

 

엘렌의 행위가 어딘지 투박하고 집착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엘렌은 그 자신이 겪은 가정폭력과 그로 인해 자기를 침독당한 기억을 지녔기에 테오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자신의 부모와 일그러진 약속-이 충실함이 아닌 어떤 굴레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엘렌이 테오를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은 바로 어린 시절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그로 하여금 다시 되찾는 것이고, 테오가 그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 그의 손에 꼭 쥐여주는 것이었다.

 

엘렌의 충실한 마음. 이는 옳고 그름을 구분 짓는 감각이 아니라 자신을 등지지 않음이고, 결국 과거에는 놓쳤을 수도 있는 손을 붙잡는 행위였다. 또 “기억의 주름 속에 숨겨둔 빚”이자,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이기도 했다.


나에게 지난밤의 악몽은 내가 감추고 싶은 부분이 드러나는 고통을 알려줬다. 얼룩과 흉터가 드러날 때의 수치심. 내가 그 자국을 먼저 바라봐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나를 이해하려면 아직 너무 먼 길이 남았다. 조금만 천천히 지치기를 바랄 뿐이다.


 
“충실함은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기도 해요. 그러니 자신의 충실함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조원용 컬처리스트.jpg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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