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베리아의 한기 속으로 - 트로츠키와 야생란 [문학]

글 입력 2020.12.1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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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작가의 소설을 처음 만난 것은 한국 현대소설을 다루는 교양 수업에서였다. 창비의 계간지 2020년 봄호에 실린 「유명한 정희」라는 단편소설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내고 중년이 된 또 다른 두 명의 정희. 서로 다른 중학교로 진학하며 둘은 더 이상 왕래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 예전의 기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정희와 숨 오래참기 놀이를 한 것.

 

주인공은 숨을 미처 참지 못해 물바가지에서 얼굴을 들었고, 바가지에 얼굴을 박고 있는 정희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망령이 들 거야.” 친구면서 라이벌이면서 동명이인인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망령이 될 거라던 자신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단순히 두 인물만이 그려지고 있는 데도, 둘 사이의 관계가 너무 복잡미묘하고, ‘망령’이라는 말은 소설의 마무리를 그로테스크하게 물들인다.

 

 

2

『천국보다 낯선』은 그보다도 더 충격적이었다. 이장욱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주인공이 옛 연인의 자실을 예감하고 그에게 달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불안과 공포를 무릅쓰고 도착한 곳에서는 옛 연인이 차에 시동을 걸고 어디론가 떠나려는 모습이다.

 

안도와 분노가 동반된 사랑의 감정에 휩싸인 주인공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에게 소리친다. “죽어! 죽어 버려!” 어두운 밤속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사람이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외친 말은 마음에 없는 소리일까 아니면 마음의 소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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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작가의 장편소설 『천국보다 낯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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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의 소설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은 아주 전위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이 전위성과 현실성 사이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은 도취다. 도취적인 감정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향기를 맡았더니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더 나아가 그 공간이로 이동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혹은 어떤 촉감이 피부에 닿으면 그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진다. 이러한 것들도 도취라고 부를 수 있다면, 도취라는 것은 기본적인 감각,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후각과 촉각, 미각에서 출발하여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다.


이장욱의 소설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는 미묘하고 오묘한 느낌들이 도취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마르그리트 뒤라스나 프랑수아즈 사강과 같은 소설가들이 그려내는 도취, 혹은 보들레르나 김소월의 시에서 느껴지는 근원적인 감각들과 닮아 있다.

 

「유명한 정희」에서 물바가지에서 고개를 들어 축축하게 젖어있는 얼굴에서 나오는 ‘망령’이라는 말, 그리고 『천국보다 낯선』에서 벅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그리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발견한 옛 사랑의 모습. 이러한 것들이 이장욱의 소설을 감각적이고 도취적인 차원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자음과 모음》 2020년 가을호에서 이장욱 작가는 또 하나의 문제작을 발표한다. 「트로츠키와 야생란」. 이것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에세이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리처드 로티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소련의 사상가 레프 트로츠키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의 에세이에 담았으며, 이장욱은 자신의 주인공들을 트로츠키의 고향인 엄동설한 러시아로 옮겨다 놓았다. 얼어붙은 호수를 배경으로 이장욱은 또 어떤 도취적인 풍경을 그려놓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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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야생란」가 발표된

《자음과 모음》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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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와 야생란」의 주인공은 찬 바람이 몰아치는 호숫가를 거닌다. 이곳은 옛 연인과 함께 거닐었던 곳이고, 옛 연인은 이제 없다. 시민 운동가였던 그는 정쟁에 휘말렸고 집어 틀어박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런 그를 데리고 함께 여행을 떠나곤 했지만 이제 그는 없다.

 

혼자 온 이곳에 주인공 ‘나’는 관광용 빙상차를 타고 호수 안의 섬에 향하고 그곳에서 며칠씩 묵게 된다. 다시 섬을 나오려고 하자 이제는 빙상차가 망가졌고, 섬을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을 세 시간씩 걸어서 나오는 것. 주인공은 이 방법을 선택한다. 해가 지고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점점 얼어가는 사지를 부여잡고 호수의 위를 묵묵히 걸어간다.


러시아에 이르기 전까지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소설의 곳곳에 드러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소설에서 제시하고 있는 배경이 우리의 현식, 또는 우리의 역사와 오묘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빙상차 운전수는 자신의 이름을 트로츠키라고 소개하였고, 주인공은 그로부터 러시아의 사상가인 레프 트로츠키를 떠올린다. 소설에서는 사상가 트로츠키의 삶을 부분적으로 조명한다. 작가는 낯선 멕시코 땅에서 운동가로 활약하고 있는 순수한 청년에게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향하고 거기서 청년으로부터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한다. 이 이야기가 소개되고 나서 트로츠키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운전수의 말에서는 무언가 암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사상가 트로츠키와 운전수 트로츠키의 병렬적인 제시 외에도, 현실의 인물이나 지시 대상에서 파생된 이미지나 상징이 소설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된다. 독자는 이런 문장들을 봉착할 때마다 소설과 현실의 시공간이 연결되거나 왜곡되는 느낌을 받게 되고, 이러한 점들 때문에 이장욱 작가의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친구여, 언젠가 너는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비극처럼 느껴지는 것도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희극이라고. 그렇게 말한 것이 하필이면 위대한 코미디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자음과모음》 2020.가을호. p150)

 


위의 인용문은 주인공이 옛 연인의 원수에게 복수를 하고 나서 남긴 독백이다. 그러한 긴박한 장면 뒤로 주인공이 저런 독백을 남길 때는 복수가 펼쳐지는 긴박한 분위기와 희극인 찰리 채플린―저 말을 남긴 위대한 코미디언이 찰리 채플린이다―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차례로 떠오른다.

 

그런 장면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면 이것은 (말그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복잡미묘한 감정을 낳는다. 황홀도 아니고 공포도 아닌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감정들, 일상생활 중에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지만 우리를 이루고 있는 감정들이 바로 이장욱 작가가 잘 그려내는 부분들이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도시에서처럼 서울에도 눈발이 날리고 있다. 앞으로 며칠간은 찬 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들이 이어질 거라는 예보가 들려온다. 바깥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없는 요즘에는 함박눈이며 찬 바람이며 모두 나와 무관한 일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간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트로츠키와 야생란」이야 말로 지금의 계절에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시베리아의 한기와 그로부터 파생된 그로테스크를 경험해보길 바란다. 잠시 창문을 열고 찬 바람을 맞으며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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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욱 작가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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