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왜 교사를 택했는가? [사람]

이것은 기성세대의 병폐와 젊은이의 아픔을 담은 증언이다.
글 입력 2020.12.1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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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내 동생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체육 선생님이 한 말이란다. 나는 동생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린아이들에게 이토록 거친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동생에게 전해 들은 당시 상황으로는, 학교에서 발야구 경기를 했는데 아이들이 경기장에 모여있었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얼른 비키라며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많은 아이를 통제하기 힘들어서 그랬을까?’ 아무리 그래도 꺼지라는 표현은 너무 심했다고 느꼈다. 그 이후에 생긴 일을 들어보니, 동생이 속한 반의 담임선생님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이 보았을 때는 아이들을 통제하기 힘든 상황도 아니었단다. 즉, 그 체육 선생님은 자신이 일상적으로 가지고 있던 짜증을 그릇된 언어를 통해 아이들에게로 표출한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교육자라는 직책은 참으로 과분한 것이었다.


나는 분노했다. ‘꺼져’라는 단어가 가진 경중을 따지며 옳은지 그른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들의 뇌리에 잘못된 교사의 인상이 깊게 심어질 것이 두려웠다. 나 또한 비슷한 상황을 여럿 겪었다.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기에 불완전한 어른을 만나 좋지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시간이 지나면 교육 현장의 개선이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체벌이 허용되었지만, 지금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내 동생이 나보다 더 좋은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이상에 불과할까?

  

갑자기 내가 다닌 고등학교가 생각났다. 성냥갑 같은 학교에서 오밀조밀 모여 공부하던 아이들. 공부할 시간을 쪼개 예술과 운동도 즐기고, 친구들과 교류하며 때로는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던 아이들. 그 아이들 곁에서 함께했던 교사들. 내 고등학교는 완벽히 이상적인 학교는 아니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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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멋있는 학생이 있지는 않았다

 

 

그 속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을 뽑아보라면 한 선생님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항상 열정적이었다. 교사로서 기본적인 교과 수업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탐구 실험과 소논문 작성, 동아리 관리까지 도맡아 진행했다. 심지어 기숙사 사감을 겸하며 밤마다 생활 태도가 불량한 학생을 찾아냈고 취침 점호 시간에 각 방을 깨끗이 청소하도록 지도했다.

 

이렇듯 그는 항상 자신에게 업무 부담을 지웠고 그에 따른 바쁜 일상을 견뎌내야 했기에 몸과 마음의 여유가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눈엣가시로 걸린 학생은 욕설이 간간이 섞인 짜증을 듣고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은 그의 모습이 교사로서 적절하다고 여겼고, 학생들을 향한 열정과 성의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나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다.

 

어느 날 오후, 한 학생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그 친구는 소설을 좋아해서 쉬는 시간에 자주 책을 읽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돌아오는 그 학생을 본 선생님은 짧은 탄식과 함께 짜증을 내며 면박을 주었다. 일 분 일 초도 모자란 입시 기간에 소설을 읽는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 학교는 휴식이나 자기계발 시간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구조였기에, 이런 상황에서 책을 빌리는 행동이 그렇게 큰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책 한 권도 못 읽게 하는데 공부할 맛이 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연휴 기간이 끝난 어느 월요일 아침에는 가족과 여행을 다녀온 학생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들고 교실에 들어왔다. 학생을 본 선생님은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놈’이라며 상상 이상의 분노를 보였다. 이 외에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자주 날카롭게 내세우곤 했다. 그의 이런 행동들은 많은 학생의 신뢰를 잃게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스스로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 학생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을 열지 못했다.


나는 나름대로 그 선생님의 ‘거친 언어’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웬만한 욕설은 참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참기 힘든 것은 체벌이었다. 그 선생님은 자신의 기분에 들지 않으면 학생의 등을 때렸다. 수업 시간에 틀린 답을 말한 학생은 약하게 때렸고, 자습 시간에 컴퓨터로 게임을 하던 학생은 강하게 때렸다. 실제로 나는 많이 맞지는 않았지만, 그가 때리는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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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는 기억도 있더라

 


나는 어렸을 때 성인에게 무차별적으로 맞은 적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몸에 피멍이 들었다. 고통스러웠다. 육체적인 고통뿐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사람이 내뱉는 독한 언어는 내 기억 안에 더 큰 고통으로 자리 잡았다. 그 이후로도 고통 속에 분노를 삭이며 청소년이 된 나는 급기야 경찰의 힘을 빌렸다. 맞아서 생긴 상처보다 더 괴로웠던 것은, 경찰관에게 내가 당한 폭력 행위를 진술하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된 나에게는 아직도 아픔이 자리한다. 얼마 전에는 정신과 진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충고를 듣기도 했다. 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니. 나는 항상 기쁨을 가지고 삶을 사려고 노력하는데, 내가 왜? 나는 유쾌한 사람이다.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불안감이 엄습하는 특정 상황에서는 내 안의 유쾌함이 사라진다. 그리고 손이 차가워진다. 그건 참 이상했다. 나는 몸에 열이 많아서 겨울에도 손이 따뜻한데, 왜 손이 차가워질까?


사실 고등학교 때는 학교생활을 하기 바빠서 나의 아픔을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는 모습을 볼 때면 내 손은 차가워졌다. 나는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선생님에게 폭력 행위를 중단하라고 항의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 선생님이 때릴 수 있는 아이들의 연령대를 생각해보았다. 고등학생까지만 때리고 중학생은 때리지 않겠지? 그렇다면 중학생에게는 욕설만 하지 않을까? 설마 초등학생한테까지 욕을 하겠어? 그건 아닐 거야.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내 손은 다시 따뜻해졌다. 동시에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 선생님에게 누군가가 성장한다는 것은 맞아도 되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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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롭다

 

 

언젠가 그 선생님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깊게 들어볼 수 있었다. 그 또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대학교 합격 소식이 들리지 않아 재수 준비를 시작하려 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추가 합격자에 선정되었고, 주어진 기회를 감사히 받아 대학을 진학했다. 경제적으로 부족한 형편에서 공사장 일꾼이나 과외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세상의 풍파를 몸소 견뎠다. 임용고시를 마치고 교사가 된 그의 사명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경쟁에 승리하여 좋은 대학교에 진학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그에게 행동력과 실행력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에, 그의 일상에서 관조적인 태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실 사연을 알고 나면 딱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법이다. 그 선생님도 그런 분이었다. 그는 성실히 살았던 자신의 삶을 학생들의 성과로 보답받길 원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않는 학생은 늘 있기 마련이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향했던 채찍을 학생에게 돌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보였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나아가 다른 사람까지도 종용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의 차가운 독설과 뜨거운 폭력은 여럿에게 아픔으로 남았을 것이다.


내가 그 선생님을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왜 교사를 택하셨어요?”

 

세상에는 온갖 직업이 있는데, 그중 교사를 고른 이유는 뭐였죠? 그 이유가 학생을 위한 것이었나요, 자신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마 둘 다였겠지요.  저는 당신께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때는 제 손이 따뜻했어요. 그러나 이따금 당신의 분노가 도를 넘어 아이들을 향해 솟구치던 때는, 제 손이 차가워졌습니다.


저는 모든 학생의 손이 따뜻하길 바랍니다. 당신의 잘못을 탓하고만 싶은 것이 아니에요. 교육의 열정이 분노와 폭력으로 탈바꿈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마 당신은 지금도 교단에서 자신과 씨름하며 학생들과 함께하고 계시겠지요. 조금은 쉬었다 가셔도 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고, 곱씹으며 기다려보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시간이 흐른 지금,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표현하는 것이 제자로서 다소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를 막연히 이상한 어른으로 여겼던 것 또한 반성한다. 그리고, 그 당시 모든 일상을 견뎌내며 살았던 친구들에게 심심한 위안을 건네주고 싶다.

 

*

 

예전에 무한도전에 출연한 설민석 강사가 “영웅은 난세(難世)에 태어난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지금은 평범한 때이니 우리는 평범한 학생들을 마주하지만, 사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유관순 열사’를 지나쳐 보내는 것과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난세에 누구보다 크고 강하게 일어날 이들은 바로 학생이라는 것. 시청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발언이었다.

 

일제의 폭압에 딛고 일어나 독립을 외쳤던 민중, 80년대의 병든 권력에 저항했던 이들 속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냥갑 같은 학교 속에서 주어진 알고리즘을 따라 진로를 찾고자 분투하는 학생들을, 어른의 눈에는 그저 어려 보이기만 하는 청년 세대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그러므로 모든 학생 또한 존엄하다. 당신의 곁에 있는 이들을 인격체로 대하라. 그들은 당신의 부하가 아니다. 당신의 직위를 뒷받침하는 보조 도구가 아니다. 어느 때나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배울 기회를 제공해라. 만약 당신 주변의 학생이 괴로워한다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라. 그 손 하나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학생이 너무나 많다.


아,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나를 걱정해 주실 것 같은 고마운 분들에게 전한다. 나는 지금 나름대로 잘살고 있다. 물론 글 속에 나의 개인적 아픔을 녹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처는 드러내어 보여줄수록 더 잘 아문다고 들었다. 난 내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어서 많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 그래서 내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실만 작성하기로 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차가운 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주 따뜻한 손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온기가 당신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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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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