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아이러니
![[크기변환]죽음의 침대.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012/20201209235947_ylbbfiov.jpg)
우리는 늘 역설적이다. 하루가 지나서도 ‘어제 일찍 했어야 했는데’, ‘그때가 좋았지’라고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잃고 나서야 그것이 소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있을 때 잘 해’라는 가사가 귓가에 울리며 후회한다. 상실하고 나서야 얻는 소중함이라니.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한 역설의 오만을 겪는다. 그리고 그 역설의 정점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을 마주하고 나서야 지난 삶을 후회하고 그리워하니 말이다.
내가 처음 본 죽음을 포착한 그림은 뭉크의 <죽음의 침대>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보이는 그림은 전체적으로 절망적이다.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듯하다. 그는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를 슬퍼하는 사람들의 표정만 보일 뿐이다. 무서울 정도로 창백한 얼굴엔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슬픔과 무력감이 보인다.
전시회에서 <죽음의 침대>를 보았을 때를 기억한다. 그림을 보자마자 뭉크가 그렸을 법한 그림이라 생각했다. <절규>가 절규 그 자체를 표현한 것 같은 작품이라면, <죽음의 침대>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해골 같았다. 마치 ‘누워있는 사람만이 죽은 것일까?’라고 묻는 것처럼.
산 사람이 죽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역설적이라 생각했다. 타인의 죽음으로 우리는 다시 죽음을 간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는 ‘죽음’을 다룬 미술 작품들을 집중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왜 화가들은 죽음을 그렸을까?’
죽음은 확실하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지에서 각자의 삶을 고민할 수 있지만, 결국 엔딩은 동일하다. 우리는 늘 끝에 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당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정해져있다. 언젠가 모두가 무조건 거쳐야 하는 것이라니. 그리고 필수임에도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니.
작가는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은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며 선명한 삶으로 이끄는 지도자”라고 말한다. 살아갈수록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죽음이니까.
“죽음이 뭐라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게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람들의 인생을 훔칠 수 없지.”
- 미하엘 엔데, 『모모』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 마주할 때, 역설적으로 삶이 선명해진다. 누군가를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잘 죽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알지 못한다. 인간이 나타난 이후 수많은 죽음에 관한 연구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을 바라보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분명 얻은 것이 있다.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것, 미리 경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클로드 모네, 1879년)
작가는 죽음을 생각할 때 필요한 다양한 관점과 유연한 태도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말한다. 죽음을 알 때 오늘을 어떻게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죽음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고 속에서 예술이 탄생한다.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를 통해 우리는 화가가 경험한 죽음을 마주하기도, 혹은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그리고 마지막엔 독자에게 말한다. ‘이젠 당신이 그릴 차례.’라고. 우리는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죽음들 사이에서 다시 삶을 사유한다. 자신의 죽음을 위해서 말이다.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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