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힘과 윤리, 현실과 유토피아의 갈래에 서서. - 연극 '작가'

글 입력 2020.12.02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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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11월 20일부터 11월 29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극단 풍경은 연극 <작가>를 공연하였다. 공연시간은 120분이었다. 본 리뷰는 내용상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해 주길 바란다.

 

 

 

예술 연극 <작가>


 

[크기변환]작가 포스터.jpg


 

내용적인 측면에서 작품에 다가가기 이전에, 작품 자체의 내재적인 구성 요소들을 살펴보고 싶다. 본 연극은 하나의 중심된 서사를 꾸준히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액자식으로 구성되어 연극 속 또 다른 연극이 진행되고, 다시 액자 바깥의 연극이 진행되는 구조이다.

 

새로웠던 점은, 극중극에서 벗어나 연극상의 현실인 줄 알았던 막(scene)도 사실은 또 하나의 연극 속 연극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것이 극중극이고, 어떤 것이 연극상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중적인 액자구조를 띄는 본 연극은 연극과 관객 사이의 벽을 녹여내는 직접적인 시도 역시 두 차례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독특한 작품 구성과, 끊임없이 느낄 수 있었던 연극 <작가>의 작가 및 연출의 신선한 예술적 시도들로 인하여, 연극을 관람하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상당히 어려운 연극이었다. 상업성보다는 예술성에 치중된 ‘예술 연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필자에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연극이었다. 필자에게 예술의 의의는 '자기표현'이며 예술의 역할은 '편견을 깨는 것'인데, 그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본 연극은 둘 모두에 충실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의 예술적 구성을 제외하고도 작품이 대중에 전달하고자 하는 바 역시 흥미로웠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 흥미로웠던 부분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막 예술가: 힘과 윤리, 체제와 반체제



시작부터 상당히 강렬하였다. 공연을 시작한다는 방송이 울리고, 출입문이 닫혔다. 얼마 후 갑작스레 출입문이 살짝 열리며 한 인물이 다급하게 극장으로 들어왔다. 좌석으로 향하였기에, 조금 늦게 입장한 일반 관람객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무대 쪽으로 다가갔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무대에 올라 가방을 가지고 다시 내려가려는 찰나, 무대 위에 등장한 또 다른 배우는 그를 향해 무엇을 하러 왔느냐고 묻는다. 가방을 놓고 가서, 가방을 가지러 다시 온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 부분까지만 하여도, 이것이 연극인지 실제 상황인지 조금 헷갈리기도 하였다.

   

남성인 ‘연출’은 ‘공연이 끝난 후에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된다’라고 하더니, 갑작스레 오늘 공연이 어땠냐고 묻는다. 여성인 ‘가방을 놓고 간 관람객’은 대답할 것을 계속 거부하다가, 남성의 요구가 계속되자 ‘최악이었다’라고 답한다. 그 남성이 연출한 공연은 여성을 성적으로 상품화하여 상업성만을 추구한, 윤리적이지 못한 연극이기 때문이었다. 여성은 그러한 연출의 태도에 대하여 여러 문제를 제기하는데, 남성은 이에 대하여 ‘재미있다는 듯’ 내지 ‘가소롭다는 듯’ 웃어넘기려 한다. 현실을 투영한 인물상이라는 해석도 해볼 수 있을 듯했다. 여성 '관객'은 페미니스트를 대변하고 남성 '연출'은 기득 사회 구조에 해당한다. 페미니스트들이 기득 사회 구조의 특정 부분이 문제가 된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대수냐고 하며 그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아니라고 가볍게 기각하는 기득권 논리의 모습을 축소하여 극 속 인물에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남성 '연출'은 과거에 여성 ‘관객’에게 성추행을 시도했던 전력이 있다. ‘관객’ 여성은 본래 ‘작가’이고, '연출' 남성은 이 ‘작가’ 여성이 우러러보았던 예술가였다. 과거에 남성은 여성이 쓴 글의 예술성을 치켜세워주며 여성을 성추행하려 했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여성은 열여섯의 미성년자였고, 남성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그러나 남성은 ‘내가 그랬던가’라고 하며,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기억이 안 나는 척을 하는 것인지 ‘아무튼 잘 모르겠다’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이후 여성의 분노 표현과 남성의 ‘대수롭지 않게 여김’이 반복되는데, 남성은 이러한 여성의 분노를 보고서는, 그 분노를 희곡으로 써보라고 이야기한다. 너의 분노는 ‘진심’이기 때문에 극을 써서 공연을 올리면 분명히 잘 될 것이라고, 자기가 무대를 제공해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이 윤리성에 관한 역설을 계속하였음에도, 남성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저 상업적 성공만을 노리는 것이다.

 

 
“팔리는 걸 신경 안 쓰는 예술가들이 있을 거 같아? 예전 예술가들은 파는 거 따윈 생각 안 한 거 같아? 그런 작품이 우리를 구원해 준다고 생각하니?”
 

 

사실은 엄청난 유혹일 수밖에 없긴 하다. 남성은 성공한 연출가이고, 여성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무명작가이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과 함께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한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 ‘도움을 얻어야 하게 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본인이 ‘전복’하길 원하는 대상이라면? ‘작가’인 여성은 자본주의적 안정성의 보장을 뿌리친 채로 연출의 앞에서 여러 번 외친다.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가부장제를 전복한다!”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가부장제를 전복한다!”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가부장제를 전복한다!”

 

 

 

2막 한 약자는 모든 약자를 옹호해야만 하는가 


 

갑작스레, 무대 감독이 등장하며 무대에 네 개의 의자를 나란히 설치한다. 다른 두 인물이 더 등장하더니, 이전까지 공연을 진행하던 두 배우는 가운데의 두 의자에 앉고, 다른 두 인물 역시 각 가장자리의 의자에 앉는다. 여성 배우는 본인을 방금 진행된 연극의 ‘작가’라고, 남성 배우는 본인을 방금 진행된 연극의 ‘연출’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방금의 연극은 제작 과정에 있는 연극이라, 관객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하며 질문을 받겠다고 한다.

 

앞서 1막의 극 속 여성은 ‘관객 혹은 작가역을 맡은 배우’였으며, 극 속 남성은 ‘연출역을 맡은 배우’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둘은 극중극의 ‘작가’와 ‘연출’이었던 것이다. 극 중 현실에서는 둘 다 ‘배우’이다. 즉, 극 밖에 있는 관람객의 시선에서 그들은 ‘배우를 연기한 배우’가 되는 것이다.

 

질문을 받겠다는 극단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관객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한다. 말을 끝내자마자 손을 들었다는 점에서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그 관객이 질문하는 것 역시 연극의 일부였다. 관객은 이렇게 질문한다.

   

 

“어..그 인물이 권력에 대해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인물인데, 더구나 여성인데도, 소수자나 약자에 관해 언급하지는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확실히, 극중극의 여성은 기득 권력과 그것의 문제점에 관하여 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뿐, 다른 소수자의 입장의 문제에 관하여서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 질문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올해 전 세계를 달군 이슈 중 하나는 바로 “Black Lives Matter” 운동이었다. 경찰,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시민(비록 '전과자'라는 그의 신분으로 인해 논란이 많긴 하지만, ‘미국 시민권자’였던 것은 사실이므로)의 죽음’ 사건이 시발점이 된 운동이었다. 그때 “All Lives Matter”라는 표어를 들어 위의 운동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코 그들이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생명은 물론 소중하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의 ‘초점’은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극중극이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피해자 입장을 대변하려 시도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다른 가부장적 사고의 피해자인 소수자나 약자에 관하여 이야기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라는 ‘작가’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 ‘작가’는 결코 소수자나 약자를 다루는 사안을 도외시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에, 한정된 표현 범위 속에서 작가가 작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모조리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모든 일에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작가’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을 테다.

 

주인공으로 A와 B가 있는 영화가 있다. 영화 포스터를 촬영하는데 이번 포스터 촬영은 A의 단독 포스터 촬영이다. 관객의 질문은, A의 단독 포스터를 보고서 “왜 다른 주인공 B는 이 포스터에 없는 것이죠?”라고 질문하는 것과도 같다. 분명 B의 단독 포스터도 있을 것이고, A와 B가 함께 등장하는 포스터도 있을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만약, ‘약자’를 대변하는 이가 ‘특정 약자’만을 옹호하고 ‘다른 약자’들은 도외시하는 경우가 반복된다면, 주인공 B의 포스터는 극소량 발행되고 주인공 A의 포스터만이 무수히 발행된다면, ‘선택적 정의’가 아니냐는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긴 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페미니즘 혹은 레디컬 페미니즘보다도 ‘젠더 퀴어’, ‘젠더리스’, ‘에코-페미니즘’ 등의, 더 다각화된 입장에서 한 사안을 바라보려 하는 대안 사상들이 대두되는 것도 페미니즘의 ‘비교적 한 관점에만 집중됨’이라는 약점에 의한 것이지 않나 싶다.

 

 

 

3막 예술, 현실. 사랑, 성욕. 


 

‘작가’는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남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남자친구'는 '여자친구'인 ‘작가’의 작품이 영화화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하며, 당연히 '여자친구'가 그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제안을 수락할 것으로 생각한다. 남성은 맛있는 요리도 해놓았고, 비싼 소파도 구매해 두었다. 여성이 들어오자마자 남성은 성관계를 갖자고 한다. 남성은 그것을 ‘즐기’는 듯하지만, 여성은 그것을 ‘처리’하는 듯하다.


성관계가 끝나고 저녁을 먹으며, 여성은 그 계약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남성은 충격을 받으며 도대체 왜 그 좋은 제안을 거절하려 하느냐고 따진다. 여성은 그것은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내 아이를 강간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서 하고 싶지 않다며 강하게 맞선다. 두 사람은 계속 같은 논쟁을 반복한다.

 

그러다 중간중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성은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남성은 ‘우리의 아기’의 소리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여성은 우리에게는 아이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막상 남성이 아기(아기 인형 소품이었다)를 안고 와서 여성에게 떠밀어 안겨주니, 여성은 우는 아기를 잘 달래준다. 필자의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아기’는 철없이 떼를 쓰려 하는 ‘남자친구’의 모습으로 보였다. ‘아기’와는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여성의 예술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주관만을 고수하려 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을 해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어찌 되었든 아기를 안게 되었을 때 그를 잘 달래주는 여성의 모습은, 남성의 몰이해를 안고 ‘가야 하는’ 혹은 안고 ‘가게 된’ 여성의 처지를 은유하는 듯하였다. 여성은 계속해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인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지만, 남성은 계속해서 '우리가 함께해야 하는 이유'인 ‘섹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겉으로는 다시 화목해진 듯하지만 두 인물의 핀트는 엇나간다. 남성은 작가가 ‘거액’ 제안을 거절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신발 더 열심히 팔게(남자친구는 신발 도매업에 종사한다)’라고 말하며 눈치를 준다.

 

 

 

4막 유토피아를 찾아서 


 

그러다 막이 정리되고, 조명이 꺼진다. 옅고 신비로운 색감의 조명이 켜짐과 함께 한 인물의 독백이 시작된다. 독백은 한참 동안 진행되었는데,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묘사 방식으로 보아, 그리스로마신화를 모티브로 하고 그것을 변주하여 진행한 듯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을 텐데, 그리스로마신화의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필자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더욱이 꽤나 긴 시간 동안 음성만으로 진행된 부분이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머릿속에 담기도 힘들었고, 그렇게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파트에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페미니즘적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싶다. 두 ‘여성’이 어디론가, 이상적인 곳으로 멀리 떠나가려 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으로 보였다.


눈여겨볼 점은, 4막이 진행된 긴 시간 동안 배우들의 연기는 부재했다는 것이었다. 작가와 연출(연극의 등장인물로서가 아니라, 이 연극 <작가>의 작가와 연출)은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필자는 페미니즘적 이상향을 설명하지만,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현해내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를 통해 '유토피아'는 실재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을 허구적이거나 허황된 사상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다. 다만 작가가 꿈꾼 페미니즘의 형상과 현실에서 직접 맛본 페미니즘의 맛에는 이질감이 있었음을 보이려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6막에서 한 층 더 두드러진다.

 

‘사상’은 왜 존재하는가. 사상이 존재함의 의의는 무엇인가. 사상은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비록 어떤 사상이느냐에 따라서 '이상적인 정도'와 '현실을 반영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무조건적 회의주의를 제외하자면 어떤 사상이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나름의 고안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사상의 이상향이 현실로 완벽히 재현될 수는 없다. 세상은 너무나도 복합적이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어떤 것을 중시하는’ 한 사상은 하나에만 치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에 집중하기에 다른 것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고, ‘사회’주의는 ‘사회’를 중시하기에 다른 것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유토피아'를 고안하는 것, 그런 에덴동산을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구현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완벽한 사상에 의한 완벽한 유토피아는 4막의 등장인물과 같이 신화 속의 ‘신’적인 존재들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5막 예술성과 상업성


 

다시 ‘작가’와 ‘연출’이 등장한다. 둘은 말다툼을 한다. 앞선 4막까지는 사실은 연극 속 ‘작가’가 쓴 극본이었던 것이다. '작가'는 4막을 마지막으로 하여 극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연출'은 거기에는 '결말'이 없다고, 결말까지 써서 가져오라고 이야기한다.

 

만약 정말로 4장을 마지막으로 하여 본 연극이 막을 내렸다면, ‘연출’의 말대로 보통 사람들은 연극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며, 필자 역시도 찜찜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4막을 마지막으로 끝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가’인 '작가'가 원하는 것이었다. '연출'은 그것은 결코 ‘잘 만들어진 공연’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4막에서 끝나게 된다면, 그 연극은 현실에는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말이 꼭 필요하다는 거야.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면 혁명은 그렇게까지 큰 가치가 없어. 안 그래? 제작비가 육천이나 들어가는 공연이고 제대로 돈 값을 해야 하고 지금은 끝이 안 난 걸로 느껴진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틀린 말은 없다. '작가'는 자신의 순수한 예술성은 추구하기 위하여 4막을 마지막으로 하여 연극을 마무리하고 싶어한다. '연출'은 예술성도 좋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6막 유토피아는 없다 


 

‘작가’는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 이번에는 '남자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한 가지 헷갈리는 점이 있었다. 여섯 번째 막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1막에서 ‘여성 배우’로 등장헀던 인물과 ‘작가’이다. 6막에서의 ‘여성 배우’는 확실히 1막에서의 ‘여성 배우’와는 다른 캐릭터이다. 그러나 ‘작가’가 3막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작가’와 같은 정체성을 갖는지, 혹은 다른 정체성을 갖는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두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을 듯했다. 첫 번째는 ‘작가’는 앞선 3막의 '작가'와 동일인물이며, 6막은 3막의 연장선이고, '작가'는 '남자친구'와 갈라서고 새로이 '여자친구'를 사귀었다는 가정이다. 두 번째는 이 6막도 또 하나의 극중극으로서 위의 3막과는 다른 하나의 설정상 연극이라는 가정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3막과 6막이 독립적으로 병행되는 ‘평행 우주’와도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본 작품의 독특한 구성을 고려하자면 뒤의 가정이 조금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연인의 성별만 바뀌었을 뿐, 서사 진행구조는 같으니 말이다.

 

'여자친구'는 퇴근하는 ‘작가’를 맞이하기 위하여 요리를 해놓았다. 3막과 마찬가지로 두 연인은 우선 성관계를 맺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한쪽은 ‘즐기’고 한쪽은 ‘처리’하는 듯해 보이지는 않는다. 양쪽 모두 즐긴다. 그러나 이후 양상은 3막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작가'가 지금은 원한다고 하지 않는 음식을 '여자친구'는 계속해서 원래 좋아하는 것이니 먹으라고 말한다. '작가'가 계속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여자친구'는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작가'의 질문들에 대하여 건성으로 답변한다.

 

'여자친구'는 기구를 이용한 성관계를 할 것을 제안한다. 이전까지는 계속해서 거절해 왔던 ‘작가’는 이번에는 하겠다고 한다. 두 사람의 성관계는 나이, 사회적 지위 등 여러모로 '여자친구'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지는 ‘작가’의 주도로 진행되는데, 기구가 가미된 이 성관계에서 ‘작가’는 독단적인 면모를 보인다. '여자친구'가 ‘작가’의 태도에 불만을 제기하지만, 작가는 ‘아 조용히 좀 있어 봐’라고 하며 '여자친구'의 말을 무시한다.

 

강압적인 분위기의 성관계가 이루어진다. 3막에서 독단적인 스탠스를 취하던 ‘남자친구’의 모습이 투영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이 본 연극이 단순히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작품이 아니라, ‘그래서 그것이 실현되면 과연 이상향이 도래할까?’까지를 고민해 본 연극이라고 생각한 이유이다.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갈등 이론'에 기반을 둔 사상이다. 그래서 그렇게 기존 체제를 전복하면 이상향이 올 것인가? 새로운 권력이 자리잡지는 않을까?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는 않을까?

 

*

 

이처럼 이 작품이 품어 전달하려는 바는 너무나도 복합적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여도 어려울 내용들이지만,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까지도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표현됨으로서 작가의 의도를 더욱 잘 전달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완전한 이상향을 찾는 것이란 분명히 힘겨운 일이다. 쉽게 얻을 수 없고, 쉽게 얻으려 해서도 안 된다.

 

 

[크기변환]작가-단체.jpg

극단 '풍경' 연극 <작가>의 배우진

 

 

만약 이후에 본 극의 원작자 ‘엘라 힉슨’의 연극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 번 찾아온다면, 그 연극 역시 관람해 보고 싶다. 만약 연극 <작가>가 한 번 더 공연한다면, 이 연극을 한 번 더 감상해 보고 싶기도 하다. 많은 고민과 함께 창작된 작품은 감상자에게도 역시 많은 생각을 요구한다. 한 번 더 감상하게 되면 놓쳤던 부분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멋진 예술 작품에 대하여 존경심을 보이며 성의를 다하는 것이 작품 해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글이 꽤나 길어진 듯한데, 여기까지 읽어준 멋진 독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최호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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