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군가가 골라 준 시를 읽는다는 것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글 입력 2020.11.29 14:2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_평면.jpg

 

 

끝날 기미가 없는 전염병과 지속된 단절. 실업, 취업난. 어두운 말들로 얼룩지는 미래. 일 년 앞은 물론이고 한 달 앞조차 내다보기 어려운 요즘. 불안정함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잘 사는 것이 어렵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카테고리가 감성 에세이로 가득 차는 걸 보면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가 필요한 것 같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말뿐인 위로는 듣고 나서도 공허할 뿐이라 생각해서, 그러한 책들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마음 기댈 곳은 필요하다.

 

누군가가 골라 준 시를 읽는다는 건 흔치 않은 경험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 비효율적이고,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쑥스럽다.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것이 미덕인 시대인데, 시와 고르는 행위를 통해 두 번이나 돌려 전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정성이 어색하다. 또 시라는 건 나처럼 딱딱한 사람이 읽기엔 너무 감성적인 것 같아 망설였다. 그럼에도 시집에 오랜만에 손이 가게 된 건 그런 정성과 따뜻함이 궁금했던 비실비실한 마음 때문이다.

 

 

[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01129_001556215_02.jpg

 

 

사평역에서 - 곽재구


 

시집을 처음 펼쳤을 때 마주쳤던 시는 <사평역에서>이다. 곽재구 시인의 이 시를 나는 오래전 수능 문제집에서 본 적 있다. 그때는 시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한 줌의 톱밥‘이나 ‘청색의 손바닥‘이 무슨 의미인지 열심히 필기해 두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채로운 이 시의 시어들이 문제를 만들기엔 참 좋았을 것이다. 가끔 세상에는 그런 의도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이 유용한 역할을 수행하게 될 때도 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의미 같은 건 기억도 나질 않는다.

 

밑줄을 긋고 시를 공부하던 고등학생 때에도 나는 이 시를 좋아했다. 막차를 기다리는 삶의 고단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눈 내리는 밤 온통 차가운 것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나누고 있는 온기의 느낌이 좋았다. 고단함을 비참하게 표현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따뜻함을 찾아낸 시인의 시선이 좋았다. 그러니 바쁜 손길로 넘겨버렸던 문제집의 많은 시들 중에서도 내 기억에 지금껏 남아있었을 것이다.

 

대학에 왔고 이제는 시를 읽고 문제를 풀 필요도 없는데, 오히려 시 읽을 일이 줄어들었다. 얄팍한 문제집 안에서도 좋아하는 시를 골랐던 내가 지금은 훨씬 퍽퍽한 시선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다시 마주친 <사평역에서>는 그러한 기억을 꺼내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잔잔한 웃음을 주는 시들도 있었다.

 

 

[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01129_001556215.jpg

 

 

먼 길 - 윤석중


 

이 시는 원래 동시라고 한다. 저자는 어린이를 위해 쓴 시라고 해서 밀어 놓을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이런 시를 보고 자신의 머리 위로 쏟아질 아빠의 따뜻한 시선을 상상하며 행복해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장면을 머리에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의심할 나위 없이 무조건 적인 사랑을 주고받는 아기와 아빠의 관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단단한 안정감을 준다. 이것을 네 문장으로 묘사되는 순간으로 표현한 시인의 생각이 재밌다.

 

어릴 적 가장 좋아하던 책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읽었던 동시집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시에 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엄마 말로는 내가 그 책 속 어느 구절이든 한두 단어만 읽어도 줄줄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고 하셨다. 이것 역시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물론 외우고 다니는 시도 없다. 내용을 잘 알아서 좋아했던 시는 없었다. 말이 재밌고 노래처럼 흥얼거리기 편해서 아마도 좋아했을 것이다. 지금 보아도 동시들은 재미있는 짜임새를 갖췄다. 어려운 말없이도 기분 좋은 감정들을 전달한다. 어른에게도 동시의 그러한 매력들은 유효하다.

 


[크기변환][크기변환]KakaoTalk_20201129_001556215_01.jpg

 

 

봄 - 이성부


 

다가오는 봄을 벅차게 기다리는 시다. 역시 내가 고등학교 때 줄기차게 분석하던 시였다. 이 시에서 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했던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뭐였는지 생각해내려 애쓰지는 않으려고 한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시 속의 봄은 조금 다르다.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겨울을 우리가 함께 보내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시기이다. 길거리에 비어버린 사람들의 풍경도 삭막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 혹은 다행인 것이 되었다.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 이야기하지만, 나는 일상이 돌아오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다. 돌아온다면 그것이 우리의 봄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화자의 벅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봄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보고 나서야 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내가 경험한 누군가가 골라준 시를 읽다는 것은 든든한 위로였다.

 

함께 같은 시를 읽으며 같은 마음을 공유하기까지 시집은 오래오래 기다려준다. 서두를 필요 없는 시간들을 즐겼다. 세심하게 고르고 글을 써넣은 저자의 따뜻한 마음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 지나가는 시대에 시를 읽으라는 것은 어색한 권유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여기 있다. 오랫동안 머물러야 볼 수 있는 것들을 함께 보면서 지친 마음의 주름을 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해보기에 이 책이 참 친절했다.

 

그 누구에게도 친절하고 따뜻한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박경원.jpg


 



[박경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42099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