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상현실로 찾아가는 1920 기억극장 - 황금광시대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1.27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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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살아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좋아하는 한 영화는 그런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몇천 년을 살아왔다는 주인공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왜 이 영화에 끌렸을까 곱씹어보면, 나는 항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먼 옛날을 동경하고 궁금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1920년 즈음의 사람들이 궁금하다. 서울이 경성이라고 불렸던 때다. 일제강점기였지만 단지 그 단어로만은 표현할 수 없었던 시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 안에는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 너머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일제의 탄압과 검열, 그리고 이해관계 속에 당시의 삶을 다각도로 알려줄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참 아쉽다.


광화문에는 딱 그 시기인 1926년에 지어진 옛 동아일보 사옥이 있다. 주변의 많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다시 지어지던 100년 사이에 이 건물은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는 일민미술관으로 사랑받고 있는 그곳에서 1920년대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를 한다고 하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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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제목은 1920 기억극장 <황금狂시대>.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따온 제목이다. 전시는 1920년대 발간되었던 신문과 잡지 등의 기록물들을 기반으로 작품을 만들고 조성한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경성을 산책할 수 있도록 한다. 이 중 관심이 갔던 두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이번 전시 리뷰는 가상현실(VR) 전시로 관람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 코로나 19로 미술관 운영이 축소되기 시작하며 미술관들은 온라인에서의 미술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중 가상현실 전시는 이미 전시되고 있거나 혹은 이를 위해 새롭게 구성한 전시를 가상현실 속 360도 화면으로 구현한 것이다. 앞으로 미래의 미술관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가상현실 전시를 통해 어떤 감상을 가질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 싶었다.


 

 

상상과 소리로 재현한 경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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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狂시대> 가상현실(VR) 전시 캡처

픽션 픽션 논픽션 Fiction Fiction Nonfiction, 2020



어두운 공간 속에서 수직으로 빛나는 조명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어떤 형상을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사각의 프레임들이 전시 공간을 꽉 채우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첫 번째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뮌MIOON의 <픽션 픽션 논픽션(Fiction fiction nonfiction)>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헤드셋을 건네받게 되는데(가상현실 전시에서는 동영상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곳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 마침 저기 응접실에 들어선 제가 보이는군요. 지금과는 사뭇 달라 보이긴 합니다만, 제가 확실합니다."
 

 

이 남성은 1933년 7월, 잡지 <신여성> 속 '당대 여성인 생활 탐방기' 시리즈의 첫 인터뷰를 위해 피아니스트 윤성덕의 집에 찾아갔던 과거를 꺼내 든다. 윤성덕의 일상을 담은 인터뷰 음성에 조응해 빛들이 이리저리 일렁인다.


피아니스트 윤성덕은 당대를 대표하는 신여성 중 한 명이었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의 동생이기도 하다. 당시에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부유하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옅어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축음기를 틀고, 영화와 음악회를 좋아하고, 양식을 즐기는 일상. 그녀의 일상을 많은 사람들이 동경했다.


윤성덕의 집 역시 서구식 외관과 구조로 지어졌는데 이를 '문화주택'이라고 부른다. 문화주택은 그 시대 사람들이 선망했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이다. 근대적이고 부유한 삶에 대한 동경. 더불어 그 집을 짓는 건축가들에게는 동시에 자신의 손으로 실현하는 유토피아이기도 했다.


뮌MIOON은 문화주택을 지었던 건축가 박길용의 도면을 바탕으로 현재라는 공간 위에 이 유토피아를 다시 쌓아 올린다. 뼈대만 남아 앙상한 건축물은 귀를 두드리는 풍부한 소리를 통해 상상으로 채워져 나간다. 입체 음향으로 녹음된 소리는 마치 그 공간 안에 내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의 일상과 삶, 동경과 유토피아를 집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풀어내고 그 매개체로 빛과 소리를 활용한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이야기를 건네는 남성 기자가 그 시절부터 쭉 살아온 영원한 존재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관람객에게 속삭인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하지만 가상현실 전시에 주어진 것은 약 30초 남짓한 짧은 영상뿐이다. 그마저도 앞에 인용한 멘트가 전부이기 때문에 나머지는 전시 설명에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30분 정도의 체험이 가능한 작품이기에 좀 더 어떤 작품인지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 어떨까 아쉬움이 들었다.



 

또 다른 세계의 경성을 산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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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경성 방랑 Kubo, Walks the city, 2020 ©일민미술관



네 번째 씬(전시의 극장 컨셉에 맞춰 섹션을 씬Scene이라 부른다)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것은 구보 씨가 온종일 돌아다닌 흔적이다. 앞으로 우리가 같이 밟아 볼 발자국이기도 하다.


미디어 아티스트 권하윤은 1934년 서울을 산책했던 소설가 구보씨(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에 영감을 받아 관람객이 당시 서울의 시대상 속에 들어가 볼 수 있는 가상현실을 기획했다.


1930년대는 언론 탄압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시사만화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시 풍경을 그리고 유머러스하게 사회 모습을 풍자하는 만문만화가 유행했다. 권하윤은 검열로 삭제되거나 지워져서 알 수 없는 당시의 상황들을 만화를 통해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연결해 경성을 재구성했고, 가상현실이라는 매개체로 생생하게 재현한 것이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면 흑백으로 구성된 세상과 만문만화에서 보던 캐릭터들과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정말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지나쳐 거리를 걷는다. 어쩌면 지금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가상과 현실의 교차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상현실 전시에서는 사진과 영상이 제공되어 VR로 보이는 화면을 조금 상상할 수 있었지만 막연한 상상 정도였다. 궁금해져 따로 찾아본 홍보용 영상으로 작품의 분위기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영상이 가상현실 전시에 적용이 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과거와 현재, 실재와 부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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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狂시대> 가상현실(VR) 전시 캡처



1920 경성과 기억과 산책이라는 키워드로 그려간 이 전시는 직접 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웠다. 전시를 다 보고 나니 좋은 전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답답하고,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직접 전시장에 가서 관람하는 것이었다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가볍게 다리를 움직이면 된다. 다른 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홈페이지로 구현된 가상현실에서는 마우스로 볼 작품을 계속 클릭해야 하고 그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각도가 나올 때까지 조정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자동으로 볼 수 있는 투어 기능이 있지만 세세하게 보기는 어려웠다.)


더불어 무료로 모든 것을 공개할 수 없기에 분명 한계는 있겠지만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회화처럼 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해야 하거나, 볼 수 없는 영상인 경우는 더 어려웠다. 전시가 어떤 모습으로 되고 있는지는 살펴봤지만 정말 작품을 만나고, 이 전시를 봤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나에게는 '전시'라기보다 '전시에 대한 프리뷰' 정도의 느낌이다. 아, 이 작품 재밌겠네. 가서 봐야지 정도랄까.


어떤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복합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한다. 미술관에 가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작품을 만나고 집에 돌아가며 겪었던 일, 그곳의 분위기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작품을 둘러싸고 있는 그 존재감들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


분명 온라인에서의 경험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함이 맞지만 오프라인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고, 작품을 제대로 알 수 없던 것 때문에 이런 아쉬움이 드는게 아닐까 싶다. 물론 가상현실 전시의 목표가 오프라인을 대체하는 것은 아닐 것이므로, 앞으로 온라인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성을 계속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시'였기에 가상현실로 보는 게 굉장히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기술을 통해 가상으로 재현된 1920 경성이라는 공간을, 또 다른 실재하지 않는 공간인 인터넷으로 접근한다는 경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실재과 부재의 사이를 헤매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오프라인 전시를 가겠다는 결심으로 끝을 내야겠다.

 

 

[최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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